시간이 한참 흘렀다. 미동(微動)도 하지 않고 김수환 추기경 흉상을 바라보던 이희웅(바오로, 66)씨가 무슨 영감이 스쳤는지 다시 나이프를 들고 턱선을 다듬기 시작했다. 사물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서 정말 빛이 나는 것 같다.
인상적인 것은 눈빛만이 아니다. 갈라지고 터진 그의 손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한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촌부의 손도 이토록 거칠지는 않을 것 같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국내 성미술계에서 장인(匠人)을 꼽으라면 이씨 외에 별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그는 장인이란 표현을 겸연쩍어했다. 다만 "성물에 미친 것은 맞다. 성물 제작은 썩 좋은 밥벌이도 아니다. 그리고 손해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옆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대 출신도 아니다. 그저 성물이 좋아서 이탈리아로 건너가 12년 동안 죽을 둥 살 둥 고생하며 배우고 돌아와 경기도 용인 작업실에 파묻혀 성물을 만들고 있다.
# 성물 제작에 미친 `쟁이`
유학 시절에는 성물 장인들의 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이탈리아 최대 성물제작사 `도무스 데이(Domus Dei)`에 들어가 1년 동안 무보수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몇 백년 대를 잇는 유명 성물제작사가 외부인의 공방 출입을 허락한 것은 삼성전자가 경쟁사 엔지니어에게 반도체 공장 문을 열어준 거나 마찬가지다.
그가 1993년 `바오로 아트`(011-796-2397)를 세우고 만든 감실ㆍ성합ㆍ제대ㆍ십자가ㆍ성상ㆍ유리화 등이 전국 성당과 성지 40여 곳에 산재해 있다. 어떤 성물이든 다 다루고, 도금과 주물만 외부에 맡길 뿐 나머지는 모두 그가 직접 하는 게 특징이다. 유럽에서 고가의 성물을 수입해 넘기거나, 중국에서 대량으로 값싸게 제작해 실어오는 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2~3m 크기 성상을 만들더라도 고집스럽게 FRP 수지와 유리섬유를 두 배로 쓴다.
그는"다른 것도 아니고 인간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이끌고, 신자들이 그 앞에서 기도하는 성상인데 돈 몇 푼 더 벌려고 재료를 아끼겠느냐"고 말했다. 또 "성당이나 성지에 설치돼 있는 성상들을 손으로 두드려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그는 "12년 동안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성물제작사는 다 돌아다녔다"며 "굳이 구분하자면 내 작업은 이탈리아 성물 전통 명가(名家)의 제작 방식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 밀집한 유명 성물제작사의 80는 2~3대가 함께 일하는 게 보통이다. 손자는 조각을 하고, 아버지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작업을 한다. 할아버지는 최종 검사와 포장을 맡는다. 그리고 전시실에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만든 성물도 보관돼 있다. 그게 `쟁이 집안` 전통이다."
그는 귀국 초기에는 성물 제작을 의뢰해오는 본당 신부들과 실랑이를 자주 벌였다. 디자인 면에서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옆을 쳐다보지 않고` 작업을 포기했다.
▲ 농부의 손보다 더 걸치고 험한 이희웅씨 손에서 장인의 외곬 인생이 절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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