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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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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자기를 위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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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지학(?己之學)과 위인지학(?人之學). 유가(儒家)가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을 구분 짓는 기준이다. 위기지학이란 자기를 위한 배움이고 위인지학이란 타인을 위한 배움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위인지학이 더 그럴싸해 보이지만 유가는 위기지학을 표방한다. 자기 없이 타인을 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인지학은 타인의 시선이 삶의 기준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서열을 짓고 붕당을 이룬다.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경쟁자 혹은 적을 만들어 그를 비난하고 싸워 이기는 것이다. 내면에 남는 것이 없다. 자기 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기만을 위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여기서 ‘자기’란 이기주의적 자기는 아니다. 공자는 “참다운 인격완성이란 편협하고 자기만 아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克己復禮?仁)고 말했기 때문이다. 참다운 자기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기 없는 자기. 사실 하느님과 하나된 자기를 말한다. 그것이 복례(復禮), 즉 하늘의 뜻과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오늘은 교황 주일이다. 교황님에 대한 대표적인 수식어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다. 세속적 관념의 황제는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고 백성들을 종으로 여기지만 교회의 황제는 모든 백성의 종으로 존재한다. 황제라는 이름과 종이라는 이름 사이의 역설은 복음적 메시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가 되는 것은 꼴찌가 되는 것이며 가장 높아지려는 자는 가장 낮아져야 하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전복인 것이다. 이 역설과 전복은 ‘나’에 대한 질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참으로 나 자신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를 버리라. 이것의 정점에 예수님의 죽음이 존재한다.

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서의 엘리야는 자신의 후계자인 엘리사를 만나 가사(袈裟)를 전수하듯 자신의 예언자 의복을 엘리사에게 걸쳐 준다. 겨릿소를 몰던 엘리사는 그날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엘리야를 따른다. 자신의 생계를 위한 겨릿소와 쟁기는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줬던, 그래서 자기를 지탱해 주던 상징물이다. 그래서 그가 버린 것들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과거를 지탱했던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제 그가 가야 할 길은 자기의 길이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이 된다. 참으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의 시작인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참다운 자유를 얻는 것, 그래서 참으로 자기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단어가 가진 뉘앙스를 적절히 조절해 사용한 다음의 구절이 흥미롭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 5,1.13) 여기서 1절의 ‘종살이’와 13절의 ‘섬기십시오’는 희랍어의 ???(노예, 종)의 명사형과 동사형이다. 종살이가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면 섬김은 사랑으로 인한 노예살이가 된다. 노예살이라는 점에서 전자와 후자는 동일하지만 후자는 참다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자유란 육체의 욕구에 따른 방종이 아닌 타인을 섬김으로 인해서 성취되는 것, 즉 자신을 버림으로 인해 참다운 자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오로의 말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고 그것은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이 되지 않는 자유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흔히 자유와 방종을 혼동한다. 자유를 마치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 정도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란 공자의 말마따나 ‘생기고 사라지는 데 있어 정해진 시기가 없고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出入無時莫知其?)이다. 아무런 방향성 없이 움직이는 것을 자유라고 한다면 이는 동물의 정해진 운명보다 무가치하고 슬픈 일이다. 이런 무가치한 방종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그곳에 자유의 참된 시작이 있다. 이제 인간에게 스스로 자기 운명의 한 꼭짓점을 담당할 위대한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선택권만을 지닌 것에 제한되지 않고 그 자유를 완성할 책임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자유가 무작위한 자유 운동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끊임없이 창조되는 생명의 질서에 부합하는 선택이 되도록 하는 책임이다. 육욕이 원하는 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면 죄의 노예가 되고 성령이 원하는 대로 노예가 된다면 참다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이며 부탁이다. 참다운 자유란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이지만 거기엔 나를 극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복음에 나타난 세 부류 제자의 모습도 이것을 시사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이에게는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하시고 당신이 따르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더 큰 것을 요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는지 복음은 전해주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구미나 예상과는 언제나 같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듯하다.

사실 우리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나의 내밀한 욕망을 지지해 줄 피상적 지식에 근거한 고집스런 계획과 구상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나의 열망은 언제나 참다운 길을 제시하는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부단히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히 드러난 사건이 바로 죽음을 맞이하던 때의 예수님이다. 아버지의 뜻을 묻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이고 그것이 예수님 자신이 되는 길이셨다.

나의 고집을 버림으로 인해 내가 되는 신비. 그 무한한 자유의 공간에 유일한 이정표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타인의 시선에 이끌리지 않고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자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버리는 사랑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오늘 말씀처럼 말이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갈라 5,14)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우선 나를 버려야 한다. 그 사랑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참다운 나를 발견한다. ‘너와 하나가 된 나’가 그것이다. 나도 버리고 너도 버리지만 우리 안에서 너와 나가 동시에 되살아난다.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길, 부활의 길일 것이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6-25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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