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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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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그리스도인의 힘은 내 안에 모신 성체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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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성월, 만나고 헤어진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오래도록 마주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도 싶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과 첫 대면을 가졌던 자캐오를 생각하며 문득 삶 안에서 인연을 맺은 하고 많은 관계가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움을 담아 진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오늘 지혜서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자꾸 신명기 구절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신명 21,22-23)라며 시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구절이 마음에 맴돌았습니다. 비록 하느님께 저주를 받아 세상을 마감한 사람의 시신일지라도, 죽을죄를 지어서 백번 죽어 마땅한 죄인의 몸이라 하더라도 주님께는 혐오스럽지 않고 싫지도 않다는 뜻이라 새겨졌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라는 지혜서의 고백에 아멘이라 화답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물론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죽음 앞에서 몸가짐을 경건히 하라는 가르침일 터입니다. 동시에 그런 불쌍한 삶을 살지 않도록 스스로의 삶을 살펴 살아가라는 경고이기도 할 테지요. 성경은 그 이유가 주님께서 주신 땅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조처임을 곁들여 밝히는데요(23절 참조). 주님께는 주검마저 이렇게 소중할진데, 숨을 쉬고 살아가는 우리 몸은 얼마나 귀하게 여기실지 어림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몸은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신 귀하고 귀한 하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몸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한 고귀한 육체를 지녔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물드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오늘 자캐오에게 다가가시듯 세상의 모든 이에게 다가가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어드리며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깨우쳐주시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시면서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당신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신앙생활은 성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하늘의 힘을 얻어 세상에 파견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은 세상에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파견된 하늘 시민의 긍지를 잃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합니다. 손안에 쥔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는 일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모두 외롭답니다. 누구와도 통하지 않는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답니다. 그럴듯한 겉모습으로 공허감을 감추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저 눈만 뜨면 세상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곁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 현혹되어 집중하느라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진정한 관계가 아닌 소유의 극대화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소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 세상 핑계를 합니다. 달라진 세상 탓이라는 토를 답니다. 명백한 잘못이요 타락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오직 자신의 소유를 극대화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려 했던 카인의 비루한 방식인 까닭일 뿐이니까요. 삶을 사랑의 관계로 꾸려가라는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행태일 뿐이니까요.

이기고 군림하려 드는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지 못하십니다. 소유에만 골몰하여 타인과의 관계를 손익으로 따지는 피폐한 삶을 영위한다면 주님이 계시지 않는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카인처럼 하느님을 떠나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2)로 전락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럭저럭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아가니 어찌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순수한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강해집니다. 특히 하느님과의 만남은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가미되지 않고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기에 당신의 모든 것을 오직 살리는 일에만 사용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모시고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캐오를 변화시키신 주님 사랑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고스란히 주입되어 있습니다. 그날 자캐오보다 훨씬 월등한 주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으로 돋움하기 원하십니다. 자캐오처럼 주님을 뵙기 위해서 숱한 장애를 딛고 도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꼭 그날 자캐오처럼 몹시 귀하게 대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독한 삶에 갇혀 지내는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캐오처럼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며 움츠러든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공간을 제공해 주시려 쪼개진 빵으로 우리 안에 오시어 함께 하십니다. 카인처럼 사랑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그날 자캐오처럼 사랑하고 베풀며 살아갈 힘을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관계 안에서 관계를 통하여 자아를 고귀하게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힘으로 이웃과 사회에 덕을 끼치는 존귀한 빛을 비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맙시다.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니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니까요.


저는 지금 벅찬 마음으로 기도드리며 이 글을 적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주님께 자신의 하루를 보고드릴 수 있기를, 내가 먼저 변해서 상대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주님께 알려드릴 수 있기를, 하여 오늘 누군가를 용서한 마음자락을 보여드리고 자꾸 솟구치는 욕심을 깡그리 봉헌해드리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다사다난한 세상살이 중에서도 믿음으로 도약하고 희망으로 버티시길 기도드립니다. 마침내 우리의 매일이 변화되어 그날 자캐오처럼 기쁘고 행복하기를 소원하며 내처 주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또 원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찬미드리며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시려는 당신의 힘에 의지하여 당신의 힘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이 주간이시길 소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10-29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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