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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성인] 성 가우덴시오 (10월 11일)

+1011년경, 체코 출생 및 선종 미상,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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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아달베르트 성인과 폴란드 그니에즈노의 가우덴시오 성인의 동상. 굿뉴스


가우덴시오 성인은 965년경 오늘날 체코인 보헤미아의 리비체 성(城)에서 그곳 영주인 슬라브니크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공작은 아들 이름을 ‘라딤’이라 지었습니다. 그러나 공작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라딤은 프라하의 아달베르트 성인과는 이복형제 관계입니다.

라딤은 982년 프라하의 두 번째 주교가 된 아달베르트처럼 성직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990년경 아달베르트를 따라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형과 함께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성 알렉시오와 성 보니파시오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어 가우덴시오라는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로마 수도원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992년 볼레슬라프 2세 대공의 요청을 받은 요한 15세 교황의 명령으로 아달베르트가 프라하로 돌아갈 때 그가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프라하에 도착한 아달베르트는 함께 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위해 프라하 근처에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는 체코 영토에 세워진 최초의 수도원입니다. 그런데 아달베르트와 귀족들 간 대립이 심화하면서 995년 다시 프라하를 떠나야 했습니다.

가우덴시오는 형과 로마의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달베르트는 프라하에서 더는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프로이센 지방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자 유럽 북동부 발트해 연안으로 가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가우덴시오는 이후 1003년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게 되는 베네딕토 성인과 형을 따라 선교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처음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많은 이교도의 반발에 감옥에 갇힙니다. 아달베르트도 997년 4월 23일 그단스크에서 결국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가우덴시오는 오래지 않아 감옥에서 풀려나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형인 아달베르트의 순교에 대한 기록을 전해 그의 전기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는 시복시성을 위한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가우덴시오가 언제 주교품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999년 12월 2일 파르파 수도원과 관련한 분쟁에 대한 오토 3세 황제의 법적 판결문에 ‘성 아달베르트 순교자의 대주교’라는 칭호로 그의 이름이 올라갔기에, 가우덴시오가 이미 대주교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000년 봄에 가우덴시오가 폴란드 교회 그니에즈노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가우덴시오는 1011년경 선종해 그니에즈노에 묻혔고, 1038년 아달베르트 유해와 함께 프라하의 성 비토 대성당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 교회는 두 성인의 유해가 여전히 그니에즈노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1일 목록에 폴란드의 그니에즈노에서 기념해온 가우덴시오의 이름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육체적·영적 프라하의 주교인 아달베르트의 형제요, 충실한 동료였던 가우덴시오 주교가 아달베르트의 순교를 목격하고 투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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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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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사탕202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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