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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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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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라는 압도적인 입교 동기가 시사하듯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 평화를 갈망한다.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보다 폭넓은 의미를 함축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건강·성공·복지의 총체적 결실이 평화로 귀결된다. 우리 문화의 인사말은 평화의 유의어인 ‘안녕’을 확인하거나 염원한다. 평화는 구원과 상통한다. 구약 성경은 ‘샬롬’(평화)을 기원하는 인사(탈출 4,18 참조), 축복(민수 6,24-26 참조), 망자와 유가족을 향한 위로(창세 15,15 참조)를 보도한다. “평화의 하느님”(1코린 14,33)은 수난과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와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을 선사했다.

평화의 상실인 불안의 요인은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자기 밖’의 불안은 대외 여건과 주변 정세(전쟁·폭력·재앙)가 직간접적 공포를 조성하는 국면이다. ‘자기 안’의 불안은 질병·사고, 근심·걱정이 정서를 자극하여 과거의 상처나 좌절, 현재의 실패나 갈등,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는 상태다. ‘자기 옆’의 불안은 관계 형성의 미숙함과 타인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이 깨진 그릇처럼 회복 불가능한 불화를 초래한 경우다. 이 셋의 상호작용은 불안을 극도로 조장한다.

스승의 십자가형 이후 제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로마인 지배층과 유다교 지도자의 감시 대상(자기 밖)인 제자들은 체포될 위기에 놓였다. 스승의 죽음으로 인한 제자들의 탄식(자기 안)은 과거를 부정하게 하고 암울한 미래를 두려워하게 하였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으로부터 촉발된 제자단의 분열(자기 옆)은 동료 사이의 불신을 고착하였다. 이 정황을 여실히 묘사한 문구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이다. 스승의 부재(不在)는 불안의 핵심 사유였다.

수난의 상처를 간직한 스승이 잠긴 문을 뚫고 나타나 제자들에게 인사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 스승을 ‘다시 만남’(부활)으로써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이런 맥락에서 자기 밖·안·옆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은 ‘부활의 증인’(하느님의 자녀)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토마스에게 부활 신앙의 의미를 밝힌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신앙은 ‘만남에 대한 확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만남’은 ‘대면의 만남’(자기 옆)을 넘어선 ‘비대면의 만남’(자기 밖, 자기 안)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확약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이다. 제자들 ‘안에 머무르는 성령’(갈라 4,6 참조)의 열매 중 하나는 “평화”(갈라 5,22)다.

부활 신앙은 제자들이 스승을 ‘다시 만난 체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어원상 망자의 극적 소생으로 정의되는 부활은 내용상 ‘다시 만남’(재회)이며, 이 ‘다시 만남’을 통해 ‘새롭고 영원한(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만남’의 문이 열렸다. 이 만남은 우리 밖/안/옆에서 “세상이 주는 평화”(요한 14,27 : 힘에 의한 평화)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기반한 평화를 준다.

활짝 핀 봄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앞으로도 만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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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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