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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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 비움과 머묾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사유

[박병준 신부의 철학 상담] 66. 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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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는 규정을 넘어
존재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자리를 비워 두는 사유로서
영혼 치유하는 힘을 지녀



‘관조’(contemplation)는 고대 그리스어 ‘테오레인’(θεωρε?ν, 보다/관람하다)과 ‘테오리아’(θεω ρ?α, 관람/관조/이론)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성소와 축제를 보러 가는 공적 행위를 가리키다가 점차 철학적·종교적 의미로 확장된 개념이다. 플라톤(기원전 428/7~348/7)에게서 관조는 인간 영혼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되어 참된 실재인 이데아를 ‘보는’ 사건이며, 이러한 직관이 ‘상기’의 근거가 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관조를 인간이 원인과 원리를 인식하여 ‘지혜’에 이르는 이론적 활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완성된 현실태의 활동으로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구성하는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관조적 삶’이야말로 실천적 삶에 대비되는 최고의 삶의 형태이다.

단순한 지식을 넘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상담은 ‘관조 철학’(Contemplative Philosophy)을 핵심으로 삼는다. 관조 철학은 이성의 합리적·추론적 사유를 넘어, 지성의 직관적 통찰로 참되고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지혜의 학문’이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사변적 철학에 머물지 않고, 삶을 고무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실천적 차원의 ‘철학실천’(Philosophical Practice)과 궤를 같이한다. 철학실천으로서의 철학상담은 관조 철학을 통해 우리 삶에 사유의 ‘빈터’(Lichtung)를 마련함으로써, 진리 세계이자 보다 큰 실재로 나아가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이러한 사유의 빈터(관조)는 일상적 사유의 타성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실재에 다가섬으로써 삶의 고통을 해소하고 존재의 활력을 되찾는 실천적 과정이다.

사유의 빈터를 마련하는 것은 단순한 한계를 넘어섬의 ‘경계 허물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이데거(1889~1976)는 존재가 자기를 밝히는 열린 공간을 빈터로 규정한다. 이는 존재가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자리를 비워두는 근원적 사유 방식이다. 우리 안에 빈터를 여는 관조적 사유는 실재에 대한 사색이 아니라, 실재로부터, 실재와 함께하는 사색을 의미한다. 대상적 사유의 특성이 경계 짓기에 있다면, 빈터를 여는 관조적 사유는 경계 없는 사유, 즉 경계를 허무는 사유를 뜻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존재의 ‘트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철학을 통한 치유는 단순한 사변적·이론적 사유의 차원에 머무를 때가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빈터의 열림에 들어설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사유의 빈터가 열리는 경험은 결코 쉽게 도달되지 않으며, 부단한 사유의 훈련 속에서 어느 순간 섬광처럼 도래하는 깨달음으로 주어진다. 이는 곧 영혼이 치유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울창한 숲 속에서 문득 열리는 빈터와 같은 이 트임은, 일상의 분주함을 벗어나 사유에 머무르는 관조적 태도 속에서 비로소 경험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유를,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도록 허용하는 ‘경건한 머묾’으로 이해한다.

우리의 사유는 끊임없이 대상을 구획하고 규정하느라 여유를 잃는다. 이러한 경계 짓기의 사유는 대상에 대한 붙잡음이자 동일화의 작용이며 배타성을 띠고 결국 피로를 낳는다. 반면 관조는 규정을 넘어 대상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열어 두는 사유로서, 내려놓음과 수용에 머무르며 영혼을 치유하는 힘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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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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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2장 3절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고 그의 의로움은 길이 존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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