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점혜(아가타) 복자화. 동정녀이자 순교자인 복자 윤점혜는 주문모 신부와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의 지도 아래 동정녀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동정녀들을 완덕으로 이끌었다.
1795년 6월 28일 최인길(마티아)·윤유일(바오로)·지황(사바)이 체포돼 순교했다. 이들은 전날 밀고자 한영익에 의해 조선에 입국해 사목 중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신원이 발각돼 주 신부 체포령이 떨어진 것을 극적으로 전달받고 주 신부를 강완숙(골룸바, 당시 34세) 집으로 피신시킨 후 포졸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다. 이를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을묘년 주문모 신부 체포 실패 사건이라 해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 줄여서 ‘을묘사건’, 또 장소를 가리켜 ‘북산사건’이라 부른다.
을묘사건 이후 강완숙의 집은 조선 교회 사목의 핵심 거점이 된다. 강완숙은 주 신부의 신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남대문 인근 창동에서 살다가 1799년에는 인사동으로, 1800년 3월에는 훈동(관훈동, 충훈부 후동으로도 불림)으로 자주 이사했다.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만 머물지 않고 충청도 연산에 있는 이보현의 집, 한양 계산동 최인길의 집, 창동 김 우르술라의 집과 정약종의 집, 남대문 현계흠의 집, 벽동 정광수의 집, 광통교 김가의 집,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이 강화도에 유배되면서 폐궁이 된 전동 양제궁, 김종교의 행랑채, 황해도 등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교우들을 돌봤다.
6년간 주문모 신부를 모신 강완숙의 공로 중 하나는 동정녀와 과부들을 위한 여성 공동체를 조직 운영한 것이다. 강완숙은 딸 홍순희(루치아), 윤운혜(루치아)의 언니 윤점혜(아가타), 정광수(바르나바)의 동생 정순매(바르바라), 배교자 심낙훈의 동생 심아기(바르바라), 이합규의 누이 이득임, 정분이의 친척 박성염, 조섭의 누이 조도애(아나타시아), 김월임, 이어린아기의 딸 김경애 등 9명의 동정녀를 교육하고 돌봤다.(정민,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378쪽 참조) 동정녀 윤점혜와 정순매는 사돈 간이다.
신앙인 된 후 동정 지키기로 결심
이번호에 소개할 인물은 강완숙의 집에 살면서 그의 지도를 받은 복자 윤점혜(아가타, 1778?~1801)이다. 윤점혜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 한감개(오늘날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머니 이씨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을묘사건으로 순교한 복자 윤유일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윤유오(야고보)가 그의 사촌 오빠다.
윤점혜는 가톨릭 신앙을 알게 된 후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기로 마음먹고 동정 생활을 했다. 하지만 조선의 풍속은 그를 동정녀로 살도록 두지 않았다. 조선 사회는 혼인하지 않는 것을 불효로 여겼다. 더욱이 과부나 홀로 사는 여성을 강제로 보쌈해 약탈혼을 하는 풍속이 횡행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여성이 동정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삶이었다. 그럼에도 윤점혜는 남장을 하거나 과부 행세를 하며 순교할 때까지 동정을 지켰다.
윤점혜는 사촌 오빠 윤유일로부터 주문모 신부가 1795년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 신부 곁에서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사했다. 2년 뒤 그는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동정녀 공동체의 책임자·여교우들의 모범
그는 어머니가 선종하자 강완숙의 집에서 생활했다. 그는 신앙심뿐 아니라 효심도 깊었다. “윤점혜 아가타는 어머니가 임종하실 때에 성사를 받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속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성모님 곁에서 시중을 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 ‘그 꿈이 정말이라면 열심히 연도를 바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자, 아가타는 그때부터 매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바쳤습니다.”(조선 교우들이 북경교구 주교에게 보낸 1811년 신미년 서한 중에서; 차기진, 「고난의 밀사」245쪽)
윤점혜를 비롯한 초기 조선 교회 동정녀들의 삶은 사도 시대 여교우들의 활동과 흡사했다. 우선 그들은 여성들을 교육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고 자선을 했다. 또 교회 집회 장소로 자신의 집을 기꺼이 제공했고, 선교 활동에도 협력했다. 더불어 교회 지도자로서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 헌신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윤점혜는 주문모 신부와 여회장 강완숙의 지도 아래 동정녀 공동체의 책임자로 임명돼 다른 동정녀들을 완덕으로 이끌었다. 그는 교회 가르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묵상을 즐겨 동정녀들뿐 아니라 여교우의 모범이 됐다. 그는 수호성인인 아가타처럼 순교할 수 있도록 늘 기도했다. 윤점혜는 동정녀들과 함께 매달 첨례와 송경을 적게는 6~7차례, 많게는 10여 차례 하고, 첨례 날에는 강학모임에 참여했다.
신앙 고백하며 의연하게 순교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점혜는 동정녀들과 함께 잡혀 포도청과 형조에서 심문과 형벌을 받았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고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심문관에게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신앙 고백을 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고향인 양근으로 이송돼 1801년 7월 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대략 23세였다.
그의 순교를 목격한 교우들은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증언했다. 또 양근 감옥에서 함께 갇혀 있던 한 여교우는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순교자이자 동정녀인 복자 윤점혜는 당시 사회 풍속과 관습의 한계를 뛰어 넘어 신앙 안에서 인격적 자주성을 실천한 여성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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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례(瞻禮)는 일반적으로 전례력 축일을 가리킨다. 또 매월 첫 주간 요일마다 행한 신심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박해 시대 교우촌 신자들은 주일 미사를 대신해 ‘첨례경’을 외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