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선으로 구성된 혈관이 순환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듯, 유형·무형의 선(線)이 세상 안에 ‘소통과 활력’(생명)을 제공한다. 도로·철로처럼 ‘저기와 여기’(공간)를 연결하는 ‘유형의 선’과 더불어 ‘그때와 이때’(시간), ‘이 사람과 저 사람’(관계)을 이어주는 ‘무형의 선’이 있다. 사랑은 관계를 유지하는 선이 견고한 끈과 줄로 발전한 상태다.(콜로 3,14 참조) 이와 유사하게,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연결선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선이다.
연결하는 선은 구분하는 역할도 한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보호선, 소유권 보존을 위한 경계선처럼, 선은 방어 영역을 보장한다. 선 긋기로 윤리적 가치나 실용적 가치가 선별된다. 인간관계에서도 자신을 장악하려는 상대, 상대를 지배하려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상대를 상대답게,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선이 요청된다. 이와 유사하게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분선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선이다.
아버지와 아들 이미지를 도입하여 실제 대상처럼 접근할 수 있는 성부·성자와 달리, ‘비둘기’와 ‘불혀’로 표상되더라도 형상화가 곤란한 성령은 친밀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이유로 두 현상이 포착된다. 하나는 ‘성령에 대한 회피’다. 이는 삼위 중 성령이 비주류에 속한 수식어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성부·성자와 별개의 ‘성령에 대한 몰입’이다. 이는 성령이 성부·성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간과하게 만든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는 숨은 그림으로 현존하는 ‘선’에 대한 의식을 강조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부와 성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선이며 구분선인 성령을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공언한다. 성부·성자와 더불어 세상 창조 이전부터 존재한(창세 1,2 참조) 성령은 성자의 강생(루카 1,35 참조)과 공생활(마태 12,28 참조) 중에도 활동하였고,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역동적 힘을 불어넣어(사도 2,4 참조) 교회를 본격적으로 등장시켰다.
요한 복음이 “보호자”(14,26: 파라클레토스)로 대상화한 성령은 ‘안에’와 조합하여 양방향으로 진술된다. ‘성령 안에 인간’은 하느님과 연결된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다. 이 성령은 ‘평화, 일치, 사랑의 영’(로마 5,5 참조)이다. 역방향인 ‘인간 안에 성령’은 양심에 거주하면서(로마 9,1 참조) 담대하게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한다. “진리의 영”(요한 16,13)인 성령은 “아빠! 아버지!”(갈라 4,6)를 부르는 자녀가 이 기쁨을 온 세상에 선포하도록 촉구한다. 이는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인 교회에도 적용된다. ‘성령 안에 교회’는 ‘다양성 안에 일치’(1코린 12,4-6 참조)를 도모한다. 교회 조직과 제도는 구성원의 은사들이 상호 연결되도록 조정하는 보조 수단이다. 역방향인 ‘교회 안에 성령’은 ‘식별의 영’(1요한 4,4 참조)이다. 미움에 선을 그어 용서를, 욕망에 선을 그어 봉사를 실천하게 이끄는 성령은 교회가 복음적 가치를 최전선에 배치하여 “열매”(갈라 5,22)를 맺도록 재촉한다. “오소서, 성령님!”(‘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의 시작 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