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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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들어섰다면 사후의 내 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서민선 아녜스 작가의 노년을 읽습니다] 21. 가키야 미우 「파묘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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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분의 흔적을
어딘가에 모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의례는 산 자를 위한 것일까,
죽은 자를 위한 것일까



출근길 한강 다리를 건널 때 매일 보는 표지판이 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면 서울 현충원이 나온다. 그곳에 내 시부모님이 계신다. 두 분을 선산에서 현충원으로 옮긴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서울 한복판, 바로 지척에 부모님이 계신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골이 거기에 있다. 부모님을 오랫동안 모셨던 선산에서 현충원으로 옮기자는 말이 나왔을 때 아주버님은 많이 서운해 하셨다. 물론 옮겼을 때의 좋은 점이 너무나 많았고 그게 현실적으로 옳은 판단임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기에 나서서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운하고 헛헛한 마음이 컸을 것이고 우리 모두 그 마음은 온전히 이해했다.

봉안당에서의 차례는 매우 간편했다. 일단 접근성이 좋으니 더 많은 가족이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고 모였을 때의 의례도 간소해졌다. 집에서 할 때처럼 각종 제사 음식을 준비할 수 없었고(아니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고) 차례상이 긴 술자리로 이어지지 않으니 가족들 간의 만남은 서운하리만치 짧았다(아니 그래서 깔끔했다). 다만 찾아뵐 때마다 양지 바르고 탁 트인 언덕배기가 아니라 촘촘히 구획된 칸 안에 계신 것이 씁쓸하기는 했다. 전망이랄 것이 없는 곳, 계절을 느낄 수 없는 곳, 동물도 식물도 없는 곳. 종종 생각했다. 돌아가신 분의 흔적을 어딘가에 모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의례는 산 자를 위한 것일까, 죽은 자를 위한 것일까.

가키야 미우 작가의 책 「파묘 대소동」은 당연히 ‘파묘’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얻은 지식으로, 나는 당연히 파묘를 후손들의 부귀영화 또는 불운 방지를 위한 이장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 속 파묘의 이유는 후손의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자식들이 부모와 조상들의 사후를 관리하는 것에 돈과 정성이 너무나 많이 들었던 것이다.

사건의 시작은 주인공의 돌아가신 시어머니였다. 90세 즈음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절대 시댁 및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지 않다면서 수목장을 해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많은 집이 유골을 절에 맡긴다고 한다. 그리고 주지 스님이 관리하는데, 후손들은 상당한 관리 비용을 내야만 한다. 그래서 이제 후손들이 조상의 유골을 도심 근처 납골당으로 옮기는 추세라고 한다. 파묘에 관한 책도 많고 TV에서 특집으로 다루기도 한다니 이런 소설이 나올 만도 하다.

책은 여러 등장인물의 입장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91세 시아버지는 생각한다. 죽은 아내가 자기 옆에 묻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니 서운하다고. 사위는 생각한다.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장인어른이 불쌍하다고. 딸은 생각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꼭 지켜주고 싶다고. 그리고 며느리인 주인공은 생각한다. 어차피 죽으면 무(無)인데, 살아 계실 때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대답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이상하다. 그 누구도 죽은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죽은 아내가 보고 있을 거라거나, 죽은 어머니가 알면 화를 낼 거라거나 그런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죽은 사람의 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감정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공의 말대로 약속을 지킨들 안 지킨들 뭐가 대순가. 주인공의 시어머니는 결국 수목장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시아버지는 파묘를 고민한다. 후손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우리도 몇 년 전까지 남편을 비롯한 남자 형제들은 오랫동안 선산에 드나들었다. 산길이 평탄치 않고 도시에서 떨어져 있기도 해서 가족 모두가 그곳에 드나들 일은 별로 없었다. 초목은 빠르게 우거지므로 차례를 드리러 갈 때면 낫으로 수풀을 베면서 올라가야 했다. 때마다 생각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장묘문화인가.

우리나라에도 차례와 제사가 있고 산소와 납골당이 있다. 나는 「파묘 대소동」을 읽으면서, 그 모든 것을 선입견 없이 새로운 시각으로 한 번 직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통 의례가 동시대에 끼친 순기능이 당연히 있고 유산으로 전달된 선조들의 지혜와 지식이 물론 있다. 하지만 원론적인 질문을 하면서 새롭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판이 바뀔 수도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무언가로부터 해방될 수도 있다. 다른 나라의 관혼상제에 대하여 읽는 것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우리가 놓쳐 왔을 수도, 그들이 놓쳐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익숙한 것을 새로 보며 색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노년에 들어섰다면, 사후(死後)의 내 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나는 죽고 없어지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또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고, 죽은 나는 그들에게 얼마간 영향력이 있다. 나의 장례와 나의 유골이 그렇다. 내가 살면서 만들어 준 기억이나 추억은 당연할 테고. 길어야 한 세대 정도겠지만 내가 애정을 가졌던 이들에게 좋은 결말을 만들어 주고 싶다. 죽은 나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어서도 내가 사랑한 이들을 보듬어 주고 싶은 바람이다. 그게 사람의 마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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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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