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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의 마음 주님께 돌리고 순교한 ‘참 신앙인’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34) 복자 이국승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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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이국승(바오로)은 명도회 육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다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이국승 복자화.


앞서 초기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내실화하고 조직적으로 사회에 복음을 선포한 단체 ‘명도회’를 소개했다. 더불어 명도회는 회장과 6개 소공동체 곧 ‘육회’(六會)로 조직, 운영됐다고 설명한 바 있다. 초대 회장은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었고, 한양 창동 홍필주(홍문갑, 필립보)의 집, 송현 홍익만(안토니오)의 집, 아현 황사영(알렉시오)의 집, 사창동 김여행의 집, 회현 현계흠(플로로)의 집, 명례방 김이우(바르나바)의 집이 육회 장소였다고 밝혔다.

이번 호에서는 한양 아현동 황사영의 집에서 명도회 회원으로 육회 모임에 참여한 인물 한 명을 소개한다. 바로 복자 이국승(바오로, 1772~1801)이다.


신앙 지키고자 고향 떠나 한양으로

이국승은 충청도 음성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 ‘높은베리’에서 성장했다. 호는 ‘미암’(靡庵)이고, ‘이성겸’으로도 불렸다. 그는 10대 때 ‘서학’(西學)에 대해 듣고는 이 새로운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경기도 양근에 살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찾아갔다. 그에게서 가톨릭교회 교리를 배운 이국승은 충주로 내려와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며 살았다.

이국승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 기도와 묵상, 그리고 보속에 힘썼다. 부모는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혼인을 권했다. 하지만 이국승은 결혼하면 가족 때문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거부하고 동정으로 살기로 했다. 그럼에도 부모가 혼인을 재촉하자 이국승은 집을 떠나 가톨릭 교우들이 많은 한양으로 올라왔다. 이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알 수 없으나 “1790년 역관 최인길(마티아)에게 교회 서적을 빌려 보았다”는 그의 진술로 보아 늦어도 18살 무렵에 가톨릭 신앙을 위해 집을 떠난 것은 분명하다.

최인길은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첫 구성원으로 김범우(토마스), 이벽(요한 세례자), 이승훈(베드로), 정약전·약용(요한 사도) 형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그의 아들 권상학·상문(세바스티아노) 형제, 최필공(토마스), 최창현(요한), 김종교(프란치스코), 홍익만(안토니오), 윤지충(바오로) 등과 친밀히 교류한 인물이다. 그는 또 1785년 음력 3월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체포됐다가 풀려난 바 있다. 그리고 1795년 6월 주문모 신부 대신 잡혀 윤유일, 지황(사바)와 함께 처형돼 순교했다. 교회는 이를 ‘을묘박해’라 한다. 이국승은 이들 세 명의 처형으로 일단락된 을묘박해 때 충주에서 체포됐으나 배교하고 풀려났다.


배교 후 교회로 돌아와 명도회에서 활동

그의 배교 과정 행간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이국승이 최인길과 교분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가톨릭 신앙으로 이끈 권일신의 소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양에 연고가 없었기에 북촌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오랜 기간 기거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1795년 4월 5일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가 처음으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할 때 참여했을 것이다. 배교자 한영익의 고발로 이 사실이 발각돼 정조 임금에게까지 보고됐고, 곧바로 주 신부의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최인길은 포졸들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칠 것을 직감하고 함께 기거하던 교우들을 피신시키고 자신이 주 신부 행세를 하며 체포됐다. 이때 이국승은 충주 집으로 내려갔다가 잡혀 배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국승은 배교한 지 2년 후 1797년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아현에 있는 황사영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참회한 그는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최창현·최인철(이냐시오)·현계흠(플로로)·홍재영(프로타시오)·윤종백·손인원·남송로·이합규 등과 함께 교리 공부를 하며 육회 활동을 했다. 명도회에서 그를 받아들인 것은 그의 신앙심과 인품, 비범한 학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교우들에게 알려졌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얼마 안돼 체포됐다.


형벌에도 신앙 고백·순교

그는 포도청으로 압송돼 옥에 갇힐 때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고 있던 황해도 사람 고광성을 만났다. 이국승은 그에게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라고 관장에게 가서 말할 것을 권면했다. 이 말을 들은 고광성은 즉각 회심하고 배교를 철회한 후 순교했다.

다른 배교자까지 돌려세운 이 일로 이국승은 더욱 호되게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매질을 당할 때마다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같이 되었으니,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꿀 수 없다”면서 신앙을 고백했다.

이국승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곧장 충주를 관할하던 공주 충청감영으로 이송된 후 곧바로 참수, 순교했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거둬 공주에 안장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 때 배론 토굴에 숨어 순교한 벗 이국승을 떠올리며 ‘가을 밤에 미암을 그리며’라는 시를 남겼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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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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