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친구들과 손편지를 많이도 주고받았다. 쪽지에 써서 접어주기도, 예쁜 편지지에 써서 색이 고운 봉투에 담아 주기도, 작은 노트에 서로의 하루를 번갈아 써서 주고받기도 했다. 이른바 ‘교환 일기’. 그런 놀이가 있었다. 아니 그런 놀이를 함께하는 정서가 있었다.
친구들과 매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말로 하는 이야기와 글로 하는 이야기는 콘텐츠가 달랐다. 글에는 뭔가 진실되고 비밀스럽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없는 비밀을 짜내어 쓰기도 하고 우정이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달라야만 할 것 같았다, 글로 쓰는 이야기는. 그리고 그것은 내 추억에 다르게 남아 있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암 치료 중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와 3개월간 주고받은 서간집이다. 언제 병세가 악화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픈 미야노 마키코가 먼저 편지를 주고받자고 제안한다. 그 후 스무 번의 서신 교환을 통해 둘은 질병의 우연성과 죽음의 필연성 그리고 질병과 의료, 운명과 선택,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나눈다.
미야노 마키코의 제안은 이해하기 어렵고 의아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와중에 서신 교환이라니.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그런데 사실 내일 일을 모르기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현재 아픈 사람이든 아프지 않은 사람이든, 우리는 모두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 지점에서 편지 담화가 시작된다.
서간집의 첫 화두는 확률과 가능성이었다. 우리 모두 질병과 사고의 가능성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진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겪을 확률. 이소노 마호는 “확률에 얼마나 죄가 많은지를 절감합니다”라고 말했다. 생존율·재발률·발병률·평균 생존 기간 등. 우리는 그런 일에 있어 쉽게 확률을 믿는데 그 권위는 압도적이다. 꼼짝없이 여지없이 절망에 빠진다. 이에 대해 미야노 마키코는 확률과 가능성에 관계된 본인의 질병 서사, 사유를 전하며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고 답신한다. 이를테면 의사로부터 빨리 진행되는 경우는 여명이 3주 정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그리고 자신에게 발생 가능한 증상과 그에 따라 예측 가능한 결말들. 시한부 환자로서 위험성과 가능성을 절감하고 있지만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러한 용도가 아니다. 미래를 낙관하게 하는, 무수한 가능성을 말할 때도 사용한다.
가치관을 드러내는 대화에 대해 생각한다. 가족·연인·절친한 친구, 그 어떤 타인에게라도 우리는 깊은 내면을 내비치며 살고 있는가. ‘50 넘으면 손절해야 하는 관계’ ‘나이 들어서 꼭 남겨야 하는 친구’ ‘부모가 돌아가시면 형제자매가 남이 되는 이유’ ‘친구 없어도 된다’ ‘친구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등. 자극적 문구를 내세운 관계에 대한 많은 지침과 조언을 본다. 책·글·영상물이 수두룩하다. 좀처럼 잘 안 되기에 그런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는 끝까지 어렵다.
이소노 마호는 이렇게 말했다. “암을 대하는 저의 감각은 ‘미야노를 알기 전’과 ‘미야노를 알게 된 후’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단순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와는 또 다른 것이 편지글의 힘이다. 글이란 말과 달라 차분히 생각하면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또한 편지는 물성이 있기에 보관할 수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 남으므로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러기에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행위다. 그러니 주고받은 편지로 서간집을 낸 관계란 특별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미야노 마키코는 2019년 7월 27일 책 출간을 보지 못한 채 영면했는데 2~3주 전인 7월 9일까지 서신을 썼다고 한다. 첫 번째 편지의 제목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편지의 제목은 ‘정말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가능할 거라 믿은 두 사람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노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미야노 마키코에게 이소노 마호는 인생의 마무리를 지켜봐 준 청중이자 마지막까지 사유와 철학을 가능케 하는 상대자였을 것이다. 철학자인 그에게, 끝까지 철학하도록 관계해 준 지기의 존재란 말로 설명이 어려운 무게를 갖는다. 반대로 이소노 마호에게 미야노 마키코는 어떤 존재였을까. 인류학자인 그에게 우연히 질병에 걸려 필연적인 죽음을 맞는 과정을 보여준 지기, 그가 친구와 나눈 것은 (죽음을 포함한) 한 인간의 삶이었을 것이다.
서간집에 담지 못한 둘의 사적인 이야기는 이소노 마호가 쓴 에필로그에 담겨 있다. 그는 이것을 ‘무대 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마지막 글로 인해 학자들이 나눈 대담집은 친구 사이에 쓴 애틋한 교환일기로 색이 바뀌었다. 그리고 둘의 마지막을 담은 ‘덧붙이는 글’에서 오고 간 말들은 인생과 죽음의 장르를 바꾸었다. 노년의 관계는 이처럼 중요하다. 인생의 장르를 바꿔버리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