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bc 제작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양업 신부가 중국 상해에서 남경교구장 서리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시복을 위한 기적 심사가 최근 첫 관문을 통과했다. 가경자 선포 10년 만이다. 아울러 오는 15일은 최 신부의 사제수품 177주년이기도 하다. 1849년 부활 제2주일, 최양업 부제는 중국 상해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상해 서가회 예수회 신학원에서 이탈리아 수사들과 함께 수학하던 그는 그렇게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사제가 됐다.
최 신부의 시복시성을 향한 한국 교회 신자들의 기도와 현양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그의 삶과 영성을 더욱 알고 기도해야 하는 때이다. 최 신부에 관한 여러 서적과 문헌이 있지만, 그 가운데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최양업 신부 약전’과 「한국가톨릭대사전」 11권 ‘최양업’ 항목 등 일부 자료는 사제품을 준 마레스카 주교를 “예수회원으로 강남대목구장”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교회사적 사실에 비춰볼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수정이 필요해 알아봤다.
최양업 사제 여정의 시작과 끝, ‘성가정회’
첫째, 마레스카 주교는 ‘예수회’ 소속이 아니라 재속 사제회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회(이하 성가정회)’ 회원이었다. 그는 나폴리에서 아시아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838년 중국 선교를 떠났다.
이 성가정 신학교는 1732년 중국 선교사 마태오 리파 신부가 고향 나폴리에 돌아와 설립했다. 1888년 세속 연구기관으로 전환하기까지 100명 넘는 사제를 양성했다. 신학교와 함께 만들어진 성가정회 역시 이때 해체됐다.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에 이어 한국 교회 두 번째 선교 사제인 유방제(여항덕, 파치피코) 신부가 바로 성가정 신학교 출신이다. 1834년 조선에 입국한 그는 2년 뒤 중국으로 돌아갈 때,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는 소년 최양업과 동행했다. 사제가 되기 위한 최 신부 여정의 시작(유방제)과 끝(마레스카) 모두 성가정회와 깊이 연결돼 있다.
성가정 신학교는 오늘날 ‘국립 나폴리 동양학 대학교’로 이어졌으며, 1957년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는 등 한국학 연구의 거점으로도 자리하고 있다.
‘보호권’ 갈등이 낳은 직함, 남경교구장 서리
둘째, 1849년 당시 마레스카 주교의 정확한 직함은 강남대목구장이 아니라 ‘남경교구장 서리’였다. 복자 비오 9세 교황이 남경교구를 폐지해 ‘강남대목구’로 재편한 뒤 프랑스 예수회에 맡긴 것은 마레스카 주교 선종 이듬해인 1856년의 일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포르투갈의 ‘보호권(Padroado)’이 있다. 교황이 대항해 시대를 주도한 포르투갈·스페인 국왕에게 선교와 교회 보호 의무를 지우는 대신, 교구 신설과 주교 임명 제청권을 부여한 특권이다. 이후 북경·남경교구 등 아시아 선교를 담당하는 포르투갈의 국력이 쇠퇴하자 역대 교황들은 교황 직속 ‘대목구’를 늘려갔다.
그러자 포르투갈은 기득권을 고집하며 파리외방전교회 등 교황 파견 선교사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에 교황청은 포르투갈의 간섭을 피하고자, 남경교구의 정식 교구장을 임명하는 대신 ‘교구장 서리(Administrator apostolicus)’ 자격으로 마레스카 주교에게 실권을 맡긴 것이다.
한국 교회사에 미친 ‘보호권’의 영향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전에 조선 교회는 비오 6세 교황의 위임(1792년)으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지도 아래 놓였고, 후임자들도 관할권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초대 조선대목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교구장 서리를 겸한 남경교구장 가예타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비협조로 선교 여정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유방제 신부 역시 북경교구장 서리의 재치권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1838년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 사후, 교황청은 포르투갈의 남경교구장 임명 제청을 거부하고 이탈리아 출신 베지 주교를 ‘교구장 서리’로 임명했다. 마레스카 주교의 전임자인 베지 주교는 1845년 상해에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을 허락하는 등 조선 교회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렇듯 거대한 세계 교회사의 변화 속에 28살 청년 최양업은 마침내 사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