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득 신부의 프란치스코의 향기] (17) 피조물에 새겨진 하느님의 글자와 삼위일체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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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를 바라보고 있다. OSV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들판에 핀 꽃 한 송이에서도 창조주의 섬세함을 읽어냈고, 흙길을 조심스럽게 기어가는 작은 구더기 한 마리를 보고도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라는 시편 구절을 떠올리며 사랑에 불타올랐습니다. 그에게 창조계는 단순한 물질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글자가 새겨진 성사적 존재였습니다.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가 증언하듯, 성 프란치스코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감성으로 사물에 숨겨진 비밀을 영적으로 간파하는 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 보나벤투라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창조계 관상은 13세기 위대한 신학자 성 보나벤투라와 복자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견고한 철학적·신학적 체계로 확립되었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2장 ‘창조의 복음’에도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함축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신비의 최고선이시기에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외부로 쏟아부어 피조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만물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심연에서 흘러나왔기에,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피조물이라도 그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과 고유한 구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류는 원죄를 저지르기 이전에는 피조물이라는 책을 영의 눈으로 정독하며 삼위일체를 또렷이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보나벤투라의 지혜를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만물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반영하는 한 권의 소중한 책을 쓰셨다”고 말하며,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공동 여정을 함께하는 신비로운 형제적 동반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둔스 스코투스는 온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육화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창조계의 우주적 설계도이자 완벽한 모델로 정해졌다고 직관했습니다. 그는 개별 피조물이 지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바로 이것임(Haecceitas)’이라는 독창적인 신학 개념으로 정의했습니다. 길가의 모래알갱이 하나조차 다른 어떤 존재로도 환치될 수 없는 고유한 독특함을 지니며,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무한한 생명을 단편적이고 유한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코투스는 개별자가 지닌 이러한 독특성과 차이를 통해 모든 창조물이 저마다의 다름 속에서 하느님의 선을 충만히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영적 통찰과 궤를 같이하며 오직 인간의 협소한 경제적 가치와 실용적 유용성만으로 만물을 함부로 평가하고 파괴하는 오만한 태도를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교황의 말처럼,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만물의 냉혹한 소비자이자 파괴자로 전락한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의 삶에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 숨겨진 하느님의 거룩한 심연을 바라보는 통찰의 눈을 ‘컨투이시오(Contuitio)’, 즉 영적 직관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직관을 통해 피조물에 깊이 새겨진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하고, 관계의 조화를 일구는 ‘호모 오이코노미쿠스(homo oikonomikus, 집의 인간)’로 거듭나야 합니다.
피조물의 비명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함께 귀 기울이며 이 영적 직관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회개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매이자 어머니인 이 공동의 집(oikos) 지구를 착취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찬가가 울려 퍼지는 거룩한 집으로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