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의 설립회원 중 한 명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1506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팜플로나 교외에 있는 하비에르 가족성(城)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나바라 왕국의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1512년 스페인의 침공으로 나바라 왕국 대부분이 점령당하면서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가문도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열아홉이 되던 해 가문을 되살리겠다는 희망을 안고 프랑스 파리로 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1529년 10월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기숙사 방을 쓰게 됐습니다. 이냐시오는 프란치스코가 사제가 되기를 바랐지만, 당시 프란치스코는 몰락한 가문을 다시 세우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프란치스코도 생각을 바꾸어 예수회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1534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성 데니스 성당(현재 성 베드로 성당)의 지하 묘소에서 첫 서원을 했습니다. 정결과 청빈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예루살렘에 가 선교 활동에 헌신하기로 다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과 함께 1537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다음 해에 로마로 파견됐습니다. 예수회가 1540년 바오로 3세 교황에 의해 승인을 받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시몬 로드리게스 신부와 함께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인도로 파견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인도에서 병자와 죄수들을 돌보고, 어린이 신앙교육 등을 수행하며 수천 명을 개종시켰습니다. 1549년부터 1551년에는 일본을 오가며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1551년 12월 일본에서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2년 전에 도착한 편지 두 통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가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중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고, 산타 크루즈호를 타고 광둥항이 보이는 산첸 섬에 도착했지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1552년 12월 3일 중국 본토까지 불과 14㎞ 뱃길을 남겨두고 산첸 섬에서 선종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성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립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그가 개종시킨 교우 수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