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중에서도 현대 미국 시를 전공해서 주로 시를 가르치고 연구하지만, 그 중심에는 시의 언어를 일반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소명이 있습니다. 시는 정갈한 지혜의 샘이라 그걸 나누고 싶거든요. 한국 시를 영어로, 영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저는 매일 무언가를 옮기는 사람이 됩니다. 고민을 거듭하다 마침표를 찍으면 마음이 시원섭섭. 그때그때 좀 다르지만 대개 시원 80, 섭섭 20쯤 되는데 이번에는 워낙 오래 붙잡고 있던 시집이라 시원 95 섭섭 5쯤 되는 것 같아요. 초고는 여러 해 전에 끝냈지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마침내 끝. 곧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시집 제목이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이라 오늘은 영원과 영원 아닌 것에 대해 생각이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들, 무엇이 있을까요? 떠오르는 것들이 많은가요? 영원이 아니라서 좋은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매일 기도하는 전쟁도 영원이 아니라서 좋고, 지금의 통증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을 알기에 견딥니다. 알기에 견딘다는 것보다는 믿기에 견딘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이 영원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요. 지독한 그리움이 영원이 아니라서 얼마나 고마운가요?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는 길목에서 짧게 빛났다가 스르르 무게 없이 낙하하는 꽃잎의 찰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을 상상하는 일은 지금 막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저 허공에 번지는 무수한 빛깔들을 보게 합니다. 떨어지면서 녹아버리는, 한순간 세상을 아름답게 채웠다가 사라지는 흰 눈의 부드러운 속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맹세나 사실, 확신 등 세상을 채우는 많은 것들 속에서 시인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들을 불러 우리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시집에 <택시에 두고 내렸다>라는 재밌는 시가 있는데요. ‘나는 어둠이 매일 온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 다른 하늘의 새 떼를 깨달은 사람이. / 내가 없는 너의 하루를 / 가만히 수긍한 사람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슬프고도 아픈 구절인데, 이 가만한 수긍이 참 좋습니다. 나여야만 하고 내가 있어야만 하고 모든 일에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내가 아니어도 되고, 내가 없어도 되는 마음, 이 비움. 이 대목이 너무 좋아 읽고 또 읽습니다. 오늘은 영원이 아니라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시인 다음으로 깨달은 사람인 척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저 고운 저녁노을, 그 다음엔 어둠이 매일 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영원이 아니기에 가능한 걸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다부지게 새깁니다. 영원이 아니라서 괜찮다고. 영원이 아니라서 허락되는 이 모든 기쁨과 슬픔들. 고맙다고. 그 너머에 굳건한 우리 하느님이 계셔서 너무 좋다고.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