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조 부스토네의 거룩한 동굴에서 선교 사명을 받은 프란치스코는 형제들만 낯선 땅으로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신앙을 ‘틀린 신앙’으로 여겼던 이 시기의 선교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자로서 형제들을 비그리스도교 지역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큰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프란치스코는 1219년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제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 다미에타까지 갔습니다.
당시 십자군은 나일강 범람과 홍수, 역병,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37세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측 교황 대리 펠라조의 허락을 받아 39세의 이슬람 술탄 말릭 알 카밀을 만났습니다. 그는 평화의 필요성을 말하며 술탄과 그 백성들에게 개종을 권고했습니다. 또 자신의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 제사장과 함께 그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 때문이고, 살아남는다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로 불을 등진 채 달아났고, 술탄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은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감탄해 보물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을 서약한 프란치스코는 재물을 먼지처럼 여겼습니다. 이를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는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간 프란치스코는 말릭 알 카밀을 만나 평화를 전한 뒤, 베네치아인들의 배를 타고 돌아오다 사막섬을 발견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있었다는 첫 기록은 13세기 중반 성 보나벤투라가 쓴 「대전기」에 나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1263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유해를 확인하고 대성당으로 옮기기 위해 파도바에 머물며, 프란치스코 성인이 베네치아의 사막섬에 머물렀다는 전승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베네치아의 석호를 건너는 동안 많은 새 무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새 형제들이 창조주를 찬미하고 있으니 새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시간경을 바치자고 했습니다. 새들은 사람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지만, 새소리가 기도 소리와 뒤엉켜 시간경의 응송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성인은 새들에게 자신들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잠시 소리를 멈춰 달라고 했습니다. 새들은 알아들은 듯 성인과 동료들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다시 지저귀어도 좋다고 허락하자, 자기들의 방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섬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작은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 프란치스코는 동료인 일루미나토와 함께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이 섬은 오래전부터 ‘두 포도나무의 섬(Isola delle due vigne)’으로 불렸고, 소유주는 베네치아 사람 야곱 미키엘이었습니다. 성인이 선종한 뒤인 1233년, 야곱 미키엘은 이 섬을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했습니다. 이때부터 섬은 ‘프란치스코의 섬’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5세기 무렵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섬은 한때 방치되어 황폐해졌고, 지형적 의미에서 ‘사막(deserto)’이라는 말이 붙어 ‘프란치스코의 사막섬’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오히려 긍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곧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과 단절된 고요한 은수처’라는 뜻으로 더 빛나게 된 것입니다. 수도원 입구 현판에 적힌 ‘O BEATA SOLITUDO, O SOLA BEATITUDO(오, 복된 고독이여, 오, 유일한 행복이여)’라는 문구처럼, 이곳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축복받은 고독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유일한 행복을 지금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문에 들어서면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인 13세기 사각 정원과, 염분 많은 섬에서 빗물을 받아 모아 사용하던 우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물은 육신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수도자들의 생활 공간 한가운데 자리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사각 정원 한쪽 벽에는 13세기 부조로 만들어진 프란치스코회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벌거벗은 팔은 예수님의 팔을, 옷소매가 있는 팔은 프란치스코의 팔을 나타냅니다. 두 팔의 손바닥에는 모두 못 자국이 새겨져 있습니다. 십자 모양으로 교차된 두 팔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의 삶 안에서 온전히 따르고자 했던 열망을 상징합니다.

사각 정원과 붙어 있는 수도원 성당은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이 프란치스코가 시성된 해인 1228년에 처음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의 성당은 수 세기에 걸친 증축과 개축, 복원을 거치면서도 최대한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성당과 성모 마리아 소성당 사이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장소인 프란치스코의 기도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새겨진 문장은 이곳이 성인께서 머물며 기도했던 자리임을 일깨웁니다.
‘Hic est locus ubi oravit seraphicus pater Franciscus(여기는 천사 같은 사부 프란치스코가 기도한 장소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땅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종교 간 갈등의 해소와 평화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자국의 이익만을 외치고 이웃을 적으로 돌리며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오늘,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