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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와 생명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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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재명 정부를 대변하는 핵심 표현은 단연 ‘실용주의’라 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 이념과 진영 논리를 초월해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은 바로 이 실용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먹사니즘’이나 ‘잘사니즘’은 국민 누구도 반대하기 힘든 민생 중심의 가치이기에, 실용주의는 국민통합의 새로운 기반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취임 이후 코스피 상승, 인공지능(AI) 경쟁력 강화, 외교 성과, 국제 유가 급등 국면에서의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 등은 실용주의적 국정 운영이 거둔 눈부신 결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 노선을 마냥 긍정하기는 어렵다. 실용주의가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통합을 이끄는 데 기여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성장과 효율 위주의 발전주의 사고’를 다시금 변주하여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역시 철저한 실용주의적 결과 중심 사고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러나 눈부신 성장의 그늘에서 우리가 상실해 간 근본적 가치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바로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생명 경시 풍조’는 단순한 상투적 표현을 넘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힘없고 약한 생명의 가치를 아예 논의의 장에서조차 배제하는 비정한 현실을 드러낸다. 실용주의적 사고는 생명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가장 취약한 존재들을 다룰 때 그 위험한 본색을 드러낸다.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한 환자 가족에 대한 경제적 인센티브 제안이나, 태아 생명권 보호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낙태약을 도입해 결정을 여성과 의사에게만 전가하려는 시도 등은 말기 환자나 태아 같은 약한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손쉽게 평가절하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본래 실용주의는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결과와 유용성을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 상황에 따른 유연성과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모든 도덕적 판단을 상황과 맥락 그리고 효율적 결과에만 매몰시킬 때, 어떠한 조건에서도 침해될 수 없는 생명 본연의 존엄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진정한 고통은 무엇인가? 그들의 존엄을 지키는 진정한 돌봄이란 무엇인가? 위기 임신으로 홀로 힘겨워하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을 손쉽게 포기할 수 있는 수단의 제공이 아니라, 아기와 산모 모두를 온전히 보호하는 실질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아닌가?

실용주의의 눈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비생산적이고 지루한 탁상공론처럼 보일지 모른다. 즉각적인 정답과 효율적인 해결책을 내놓기 어려운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율과 속도만을 좇아 생명의 가치를 단기적 유용성과 바꾸는 사회는 그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장의 일의 효율성은 커질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 삶의 존엄한 의미와 국가 공동체를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인 ‘인간 생명 존중’을 송두리째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면서 이룬 발전된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소중한 가치를 버린 사회에서 잘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 정부는 많은 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낙태약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이 순간이라도 대통령과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실용주의가 아닌 인간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낙태약 도입을 중단하기 바란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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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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