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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북녘 본당] 송화본당 출신 고중열(베네딕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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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촌공소는 신자 600명 넘는 아주 열심한 공동체였죠”

“죄짓지 말고 하느님 공경 열심히 하라고 밤낮으로 말씀하시던 부모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고중열(베네딕토 85 서울 면목4동본당)씨는 황해도 송화본당 출신이다. ‘성교촌’(聖敎村)으로 유명했던 송화군 하리면 안농리 농암촌에서 나고 자랐다. 부친은 3대 농암촌공소 회장을 지낸 고재화(압돈)씨고 할아버지도 역시 이 공소 초대 회장을 지낸 고성태(이냐시오)씨다. 신앙적 훈육이 엄격하지 않을 리 없다. 역시나 “아침저녁 기도 빼 먹으면 대죄를 짓는 줄 알았다”며 “빼 먹으면 꼭 고해성사를 봐야 했다”고 그는 전한다.

송화본당이 설립된 해가 그가 10살 때인 1939년인 데다 공소에서 30㎞가량 떨어진 본당은 대축일 때나 얼굴을 디미는 상황이어서 실은 공소에 대한 추억이 더 많다고 그는 전한다.

“우리 공소는 아주 열심한 공동체였어요. 공소 신자가 600에서 700명쯤 됐는데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이사를 오면 교리부터 배워야 했어요. 장순목(루카) 2대 회장 시절인 1920년대에 공소 강당을 지었는데 초가일 망정 제의실과 고해실 제대 판공 때마다 신부님이 오셔서 묵으시는 방까지 곁들인 훌륭한 건물이었습니다. 반면 본당 건물은 1939년에 송화면 향교로 쓰던 기와집을 헐어 거기서 나온 건축자재로 지었습니다.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수교목 언덕이었지만 우리 공소보다는 작았어요.”

송화본당에 대한 추억은 1944년 9월에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서기창 신부에 대한 기억이 전부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그는 서 신부 복사로 여러 공소를 돌아다녔다. 해방 뒤엔 성당에 갈 때마다 감시자가 학교에 알려 혼이 나는 가운데서도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그러나 서 신부는 1950년 7월 말 성당을 군사동원부로 쓰겠다는 공산당에게 빼앗기고 쇠골 외딴 채에 살다가 그해 10월 끌려가 순교했다.

전쟁 중 인민군에 징집됐다가 가까스로 탈출 ‘케일로 8240부대’ 곧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해 참전한 그는 1952년 9월 부친과 형 여동생(고중선 수녀 예수 성심 시녀회)과 함께 넷이서 월남해 평생을 교정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했다. 1996년엔 송화본당 출신 신자들과 함께 신우회를 조직 전쟁 중 순교한 서 신부의 시복ㆍ시성과 본당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기도했지만 회원들도 이젠 대부분 선종하고 두셋만 남았다.

“함께 월남하지 못한 어머니(김윤석 안나)와 두 여동생 형수 조카들이 보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으며 “이제 어머니도 100세가 넘으셨으니 아마 돌아가셨겠지만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여동생들 송화본당과 농암촌공소 형제들을 위해 죽는 날까지 기도하겠다”고 다짐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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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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