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세력·부정부패로 척박한 땅에 신앙의 꽃 피워
서울대교구 신천본당
본당설립: 1930년
옛 지명: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 사직리
현 지명: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읍 사직리
마지막 주임: 제6대 구천우 신부(1941.05~1949.02)“이 지역에서 성당 짓는 것은 꿈도 꾸지 마라!”
“신 숭배가 웬 말이냐!”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신천 지역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교회와 토착세력과의 마찰이 심했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입교한 신자들은 신심 없이 도를 지나친 행동을 일삼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신앙은 이어졌다.
신천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이 고장 출신 이덕보(마태오)가 1862년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오면서부터다. 천주교의 가르침에 감동한 그는 신천 지방을 비롯한 황해도와 평안도에 전교했다. 이후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이어가던 신천 지역 신자들은 1899년 기와집을 마련해 교육과 성사를 위한 장소로 활용했는데 이곳이 1930년 마침내 본당으로 설정됐다.
신천본당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기준 신부가 본당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면서다. 성당 건축을 시작으로 수녀원 개원 신자 교육에 열성을 다한 주임 신부의 노력으로 1933년 신자 수가 400명 가까이 증가했다.
1933년에는 본당 신자들이 모여 3일 동안 피정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피정 첫날은 본당 신부가 신자들을 위해 둘째 날은 신자들이 신부들을 위해 셋째 날은 선종한 뮈텔 대주교를 위해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사제와 신자들과의 관계가 돈독했음을 보여준다.
서울대교구 송화본당
본당설립: 1939년
옛 지명: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 읍내리
현 지명: 황해남도 송화군 송화읍 읍내리
마지막 주임: 제3대 서기창 신부(1944.09~1950.10)“천주교인가 뭔가 믿는 사람들은 좀 다르단 말이야.”
19세기 후반. 송화 지역에 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었던 말이다. 당시 송화군에서는 금광이 발견돼 전국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분쟁을 일으킬 때면 중개자로 나서 일을 해결하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광산 지역의 사직동공소 회장이었다.
송화에 파견됐던 선교사들은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도 천주교인들은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교우가 외지에서 온 이들과 마찬가지로 금광에서 일하거나 하천에서 사금을 캐 생활했지만 당시의 부도덕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성당 건축을 위해 오랫동안 기금을 모았다고 한다.
송화본당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송화공소는 언제 설립됐는지 정확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본당 설립을 갈망해온 신자들이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성당 건립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했고 1935년 송화면의 향교였던 기와집을 매입한 뒤 읍내리에 기와집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했다고 기록돼있다. 1939년 강원도 이천에서 전교하던 박우철 신부가 부임하면서 마침내 송화본당이 설립됐다.
송화성당을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은 제3대 서기창 신부의 시중을 들던 박순이(아가타)씨다. 그는 서 신부가 북한 정치보위부에 의해 살해된 이후에도 목자 없는 성당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1951년 공산군이 송화읍을 장악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성당에서 기도하던 박순이씨는 피란을 떠나 월남했다.
김유리 기자 lucia@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