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배운 한 풀어주는 ‘선생님’으로 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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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년 동안 배움의 기회를 놓친 여성들을 위해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을 이끌어 온 정찬남 원장. 이지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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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찬남 원장이 서울대교구 인준을 받아 펴낸 문해교육용 가톨릭 교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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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일야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여성들. 정찬남씨 제공 |
7일 오후 3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한국여성생활연구원(원장 정찬남) 강의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할머니 10여 명이 주름진 손으로 공책에 숫자를 꾹꾹 눌러쓴다. 정찬남(모니카, 70) 원장이 분수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한 할머니가 머리를 긁적인다.
“원장님, 엊그제 배운 건 어제 잊어버렸고, 어제 배운 건 기억이 안 나요. 자꾸 까먹어요.”
여든이 넘은 한 학생이 하소연하자, 이곳저곳에서 할머니 학생들이 “우리가 시대를 잘못 만나서 공부를 못했다”며 맞장구를 친다. 교실은 금방 웃음바다가 됐다. 정 원장도 함께 웃는다.
시대가 변해 지금은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배움의 시기를 놓쳐 이곳을 찾는 할머니들에게는 가슴 맺힌 한이 있다. 숫자를 몰라 혼자 버스를 탈 줄 모르고, 한글을 읽을 줄 몰라 손주의 편지를 받아들고 읽는 둥 마는 둥 했던 할머니들이다. 기도서를 읽을 줄 몰라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지 못하고, 가사를 읽을 줄 몰라 미사 시간에 성가를 그냥 흥얼거리기만 했던 할머니들이었다.
정 원장은 이렇게 교육의 기회를 놓친 가난한 여성과 노인들을 위해 38년 동안 한결같이 문해(文解)교육을 해 왔다.
1969년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원예과를 졸업한 정씨의 꿈은 수녀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려서 자주 아팠던 그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수녀들의 삶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입회 날짜를 받아 놓고, 갑작스럽게 몸이 아파 입회 날짜를 넘긴 그는 우연한 기회로 직업을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게 된다.
“새벽에 조간신문을 돌리고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의 배움을 향한 열정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계기로 한국부인회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꽃꽂이, 봉제 수업을 했던 그는 1978년 서울 봉천동 달동네에서 25명이 겨우 들어가는 쪽방을 얻는다. ‘국일학교’라는 야학을 열어 직장 여성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의 첫 출발이었다.
“당시에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부족한 교육을 채워주고 싶었어요.”
야간 중학교로 시작한 국일학교에는 교육의 기회를 잃은 여성들이 전국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주부부터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문을 두드렸다. 입시생 자녀를 둔 엄마가 한글을 배우려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공부한 적도 있다. 학생이 교실에 더는 들어갈 수 없어 복도에 스피커를 설치하기도 했다. 정씨는 친구들에게 야학교사 봉사를 부탁했다.
“야학을 찾는 학생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하면서 배우지도 못한 사람은 스스로 비참한 삶을 살아갑니다. 제가 이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은 주간 중ㆍ고등학교 과정, 경로대학 과정 등으로 교육과정을 넓히면서 배움에 대한 갈증을 채워 줬다. 성인을 위한 한글 교재를 발간하고, 쓰기 연습용 「가톨릭 교리서」를 출간했다. 연구원은 2011년 서울시 교육청에서 초등학교 학력 인증 기관으로 선정된 데 이어 지난해에 중등학력 인증 기관이 됐다. 연구원은 또 소외된 할머니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가출 소녀를 위한 쉼터도 마련하는 등 여성 평생교육과 함께 복지 및 인권 분야에도 활동을 넓혔다. 20년 동안 봉천동에서 야학을 열어온 연구원은 봉천동이 재개발되면서 서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8년 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문해교육을 시작한 70년대나 지금이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요즘도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 그는 연구원으로 초대한다. 직접 와서 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꽉 찬 교실을 보고 깜짝 놀란다.
“6ㆍ25 전쟁과 산업화를 겪고 자기는 못 배워도 애들을 공부시키느라 한글을 못 배운 거죠. 그때 학교에 못 간 게 지금까지 온 겁니다. 이분들은 옛날에 못 배운 걸로 지금까지 울고 삽니다. 인간으로서 읽고 쓸 줄 모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는 공부를 망설이는 어르신들에게 말한다. “지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는 건 다행입니다. 미루지 말고 하세요. 저도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정 원장은 “100세 시대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이 우울한 삶을 걷어내고, 밝고 자유롭게 사셨으면 좋겠다”면서 “내게 신앙이 있었기에, 내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주님이 보낸 사람으로 보고 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취재 후기“원장님, 이거 가래떡인데 선생님들이랑 나눠 드세요.”
한국여성생활연구원 강의실에 온 한 할머니 학생이 정 원장에게 비닐봉지에 든 가래떡을 건넨다. 또 다른 할머니는 집에서 가져온 김치 몇 포기를 건넨다. 원장에 대한 할머니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선물이다.
정 원장을 아는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운영해 왔느냐”고. 그러면 답한다.
“그냥 다 봉사로 운영해 왔다.”
재작년,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에서 정년 퇴임을 한 정 원장은 지금까지 월급과 특강비 등으로 한국여성생활연구원 운영비를 유지해 왔다. 지인들은 한 달에 200만 원이 넘는 사무실과 교실 임대료에 허덕이는 그에게 “이제는 그만하고 쉬라”고 만류한다.
그러나 현재 30명씩 7개 반으로 운영되고 있는 수업을 중단할 수 없다. 지금 어딘가에도 배움의 기회를 놓쳐 읽고 쓸 줄 몰라 가슴앓이를 하는 어르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한 명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