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0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성모 발현 평화의 언덕에 봉헌한 로카르노 ‘마돈나 델 삿소’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45. 스위스 로카르노 마돈나 델 삿소 성지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480년 성모 발현 전승 위에 세워진 마돈나 델 삿소 성지. 스위스 티치노 지역을 대표하는 성모 신심의 중심지로, 해발 370m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마조레 호수와 알프스가 한눈에 들어와 순례자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장소이다. 현재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가 순례 사목을 펼치고 있다.

제네바·바덴바덴·에비앙?. 유럽의 휴양 도시는 종종 전쟁과 평화의 분수령이 되는 외교 무대였습니다. 온천이나 호수 주변 평화로운 풍광, 평소 잘 갖추어진 숙박시설과 회의장 인프라는 여러 나라 대표가 모이기에 이상적이었죠.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1925년 유럽 열강이 모여 ‘로카르노 협정’을 맺었던 로카르노도 그런 장소입니다. 스위스 땅이지만, 언어와 문화는 이탈리아권에 속하는 로카르노는 알프스의 햇살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마조레 호수와 야자수가 자라는 온화한 기후로 이미 19세기부터 유럽인들에게 ‘알프스 속의 휴양지’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로카르노는 단순히 휴양지만은 아니었습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가 맞닿은 지역이어서 로마 제국 시절부터 알프스와 지중해를 잇는 교역의 도시였지요. 중세에는 밀라노 공국과 신흥 스위스 연방 사이 국경 요충지로 발전합니다. 중세에는 밀라노 공국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스위스 땅이지만 언어와 문화는 북부 이탈리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 밀라노를 지배하던 비스콘티 가문은 공국의 세력을 팽창하며 1386년 권력의 상징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대성당’인 거대한 밀라노 두오모를 건립합니다. 유럽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가장 큰 대성당이 세워지면서 성모 신심이 밀라노 공국의 정체성과 정치적 상징 속에 자리 잡지요. 이러한 흐름은 15세기 후반 로카르노에서 일어난 기적과 맞물리면서 북이탈리아 전체에 성모 신심이 고양됩니다.
로카르노 언덕 오르셀리나에 자리한 성모 승천 성당. 1891 ~1912년 성지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수도원을 확장하고, 성당 정면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다. 1919년 베네딕토 15세 교황에 의해 준대성전으로 지정됐다.
성모 승천 순례 성당. 17~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하면서 프레스코 벽화와 제단화로 성당을 장식했다. 주 제대의 성모자상은 발현 전승과 연결된 기적의 상으로, 1880년 레오 13세 교황이 천상 모후관을 봉헌했다. 주 제대 주변의 금빛 장식과 바로크 양식의 기둥, 천사의 조각은 이곳이 성모 신심의 중심지를 드러낸다.

호숫가 언덕 바위에서 발현한 성모

1480년 성모 승천 대축일 전야였습니다. 로카르노의 프란치스코회 바르톨로메오 피아티 다 이브레아 수사가 언덕 위 바위의 환한 빛 속에서 성모님을 목격합니다. 그는 이 체험을 공동체에 알리고는 바위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은수생활을 시작했죠.

당시 로카르노는 국경 도시로 불안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밀라노 공국과 스위스 연방의 갈등, 전쟁과 세금 부담, 농민과 시민의 불안정한 삶이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런 시기 ‘바위의 성모님’, 이탈리아어로 ‘마돈나 델 삿소(Madonna del Sasso)’ 발현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1487년 언덕 정상에 중재자이신 성모 소성당과 통고의 성모 소성당이 세워졌고, 1502년에는 산기슭에 주님 탄생 예고 소성당이 봉헌됩니다.

1516년부터 로카르노는 스위스 영토가 됐지만,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서도 가톨릭 정체성이 더욱 강화됐습니다. 특히 북이탈리아의 독특한 순례 성지인 거룩한 산, 즉 ‘사크로 몬테(Sacro Monte)’ 전통과 맞물리면서 성지는 본격적으로 확장됩니다. 산이나 언덕에 일련의 소성당들을 지어 성경 속 사건이나 성인의 삶을 재현하는 성지를 조성하는 전통입니다.

아무튼 17~18세기에 걸쳐 로카르노 도심에서 마돈나 델 삿소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고, 언덕길 곳곳에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작은 경당을 순차적으로 만들면서 성지가 도심 아래까지 확장됩니다. 특히 정상의 중재자 성모 소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성모 승천 성당으로 화려하게 개축됐고, 19세기에는 스위스 남부 전체를 대표하는 성모 성지로 자리 잡습니다.
마돈나 델 삿소 십자가의 길과 푸니쿨라. 17세기부터 언덕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면서 수난의 장면을 묵상할 수 있는 총 12채의 경당이 순차적으로 세워졌다. 전통적인 14처와는 차이가 있지만, 마지막 장면은 성당 상부 예배 공간과 연결돼 전체 묵상 여정을 완성하도록 구성되었다. 협궤 케이블 열차인 푸니쿨라가 성지까지 연결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거룩한 산으로

로카르노 중앙역에서 시내 방향으로 몇 걸음 옮기다 보면, 언덕 위 하얗게 빛나는 성지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오늘 순례의 목적지인 마돈나 델 삿소입니다. 노선버스나 케이블 열차로 올라갈 수 있지만,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서 오르기를 권합니다. 계단과 완만한 경사로가 섞여 있고 중간중간 예수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열두 경당이 있어 길을 오르며 마음을 정화하는 순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덕 위에 오르면 푸른 숲과 어우러진 마조레 호수와 로카르노 시내, 마지아강 삼각주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안내문의 ‘숨 막히는 전망’이라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붉은 지붕 위로 높은 종탑과 옅은 붉은색 벽체, 성지의 핵심인 성모 승천 성당의 외관은 단순하면서도 웅장합니다.
측면 제대 제단화와 도나티 형제가 제작한 목조 조각상군 ‘비탄’. 브람반티노의 ‘이집트로의 탈출’, 안토니오 치세리의 ‘그리스도의 매장’, 베르나르디노 디 콘티의 ‘주님 탄생 예고’ ‘성모 승천’ 제대화 등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모 통고를 주제로 한 그림과 조각이 성당 곳곳에 있다.

성모 통고와 그리스도 수난의 체험 공간

성모 승천 성당 내부는 주 제대를 중심으로 한 장방형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측면 제대, 스투코 장식과 프레스코가 한데 어우러진 전형적인 바로크 성당입니다. 주 제대에 모셔진 성모자상은 15세기 후반 제작된 목조 조각상입니다. 발현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적의 상’으로 공경받아 왔습니다.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는 19세기 이후 새로 설치된 겁니다.

아치형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모 탄생과 승천을 주제로 하고 있어 주 제대 기둥과 천사 조각상이 이곳이 성모 성지임을 드러냅니다. 측면 제대와 가대석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묵주 신비와 관련된 도상들을 볼 수 있지요. 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성모님 삶 등 복음의 주요 장면이 성당 공간 전체에 펼쳐져 있습니다. 로카르노 출신 도나티 형제가 제작한 목조 조각상군 ‘비탄’도 인상적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시신을 둘러싼 성모님과 제자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깊은 슬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1925년 로카르노에서 꽃 핀, 전쟁이 아니라 대화라는 희망을 보여준 ‘로카르노 정신’은 짧은 봄날과도 같았습니다. 10년도 되지 않아 전체주의의 마수에 휩쓸리고 말았죠. 극우가 대두하고 자국 이기주의가 팽배한 지금 그 정신이 다시 꽃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에 따라 흔들리는 외적 평화가 아닌, 세대를 넘어 이어질 참된 평화를 주시길 청합니다.
 
<순례팁>

※ 밀라노에서 로카르노까지 기차로 2시간(벨린초나 경유), 자동차로 1시간 45분. 역에서 십자가의 길을 거쳐 성지까지 도보로 30분. 성지까지 버스(No.3)로 15분. 내려오는 길에 푸니쿨라를 이용하면 좋다.

※ 순례 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 7:15·10:00·11:00·17:00, 평일 7:00(토)·17:00.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9-3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9. 30

2코린 5장 1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