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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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 없는 관심’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담아낸 선교사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53·끝>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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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1925년,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수도원·연합회 28년 이끈 초대 총아빠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선교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초대 총아빠스로 28년간 수도원과 연합회를 이끈 인물이다.<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세례명 요셉)는 1870년 12월 20일 상트 오틸리엔에서 북쪽으로 40㎞ 떨어진 랑바이트에서 태어났다. 1875년 7월 25일 사제품을 받고 한 달 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해 1896년 11월 1일 ‘노르베르트’라는 수도명으로 서원했다.

1902년 12월 18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초대 아빠스로 선출된 32세의 베버 신부는 임기 초기부터 특유의 열정적 추진력으로 수도원과 연합회를 발전시키는 데 전념했다. 그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이 결합된 새로운 선교 모델을 모색해 1909년 2월 25일 한국에 진출한 서울 백동 수도원에서 실현했다. 수도자들은 수도원 안에서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전례와 학문·기술 교육 등을 통해 선교 활동을 펼쳤다.<사진 2>

베버 총아빠스가 면밀히 추진한 아빠스좌 백동 수도원 설립은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결과를 낳았다. 첫째, 백동 수도원은 새로운 선교 모델의 핵심 요체인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의 병행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는 선교 베네딕도회의 정체성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하고 동아프리카에도 아빠스좌 수도원 설립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둘째, 백동 수도원은 한국 교회 최초, 선교지에 세운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최초, 동아시아 최초 성 베네딕도회 아빠스좌 수도원이다. 한국 교회의 수도 생활을 소개하는 신기원을 열었다. 셋째, 백동 수도원은 교육기관이자 사업체였던 숭공학교(1910~1923)를 통해 465명의 장인을 배출하며 가톨릭의 중산층과 한국인 성소자를 양성했다. 넷째, 백동 수도원은 탁월한 학문기관이었다. 당시 성경·언어·문화·예술·양봉·식물 연구의 중심지였다. 다섯째, 백동 수도원을 찾아오는 신자들과 방문자들에게 전례의 가치와 환대의 영성을 보여줬다. 동시대인의 영적 시야를 넓고 풍부하게 열어줬다.<사진 3>
<사진 2> ‘말 위에 올라탄 베버 총아빠스’, 1911년,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베버 총아빠스와 하우현 신자’, 1911년 3월 하우현 성당,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 방문

백동 수도원과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슈바이클베르그 수도원이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연합회 구성 법적 요건을 갖추게 된 상트 오틸리엔은 총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했고,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가 탄생했다. 성 베네딕도회 총연합회의 13번째 연합회로 가입했다. 이때부터 노르베르트 베버는 ‘총아빠스’와 ‘연합회 총재’라는 두 가지 직함을 가지게 됐다.

그는 ‘제2의 창립자’라고 불릴 정도로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성격과 구조를 새로 확립하고 선교 지역을 확장해 나갔다. 아빠스로 소임을 시작한 1902년 99명에 불과하던 수도자 수는 그가 사임한 1931년에는 949명으로 증가했다. 28년 재임 동안 독일·동아프리카를 비롯해 한국·중국·필리핀·미국·베네수엘라 등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연합회 안팎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고,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수도자였고, 선교사였으며, 여행가·예술가·사진가·영화 제작자·사냥꾼·민속학자·종교학자·세계 시민·작가였다. 한마디로 그는 ‘다층적 인물’이었다. 다양한 관심과 열정적 추진력, 재빠른 이해력과 진정한 인간성, 도전을 향한 용기 등 베버 총아빠스의 타고난 재능은 한국 문화의 풍요로움을 깊이 인지하게 했다.

낯선 문화와 종교에 대한 그의 개방성과 관용의 마음은 ‘선입견이 없는 관심’에서 출발했다. 그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선교 현안을 해결하는 동시에 한국의 정신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 가기 위해 험한 여행을 마다치 않았다. 한국 문화와 관련한 두 권의 책과 잘 편집된 한 편의 영화와 수백 장의 한국 사진 아카이브가 그 결실이다.<사진 4>
<사진 4> ‘겸재 화첩 금강내산전도’, 1911년 ?,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한국 문화의 풍요로움에 심취한 선교사

「고요한 아침의 나라, 1915」는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2월 21일부터 6월 24일까지 한국 곳곳을 세심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여행기다. 관찰한 내용을 글과 사진·수채화·스케치 등으로 담았다. 1925년 여행의 결과물인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 1927」는 서울 시가·혼례·장례·농업·각종 수공업·춤·농악·사찰·미신·금강산 풍경 등을 담았다. 총 촬영 필름분량이 15㎞나 된다.

「한국의 금강산에서, 1927」는 베버 총아빠스의 금강산 유람기다. 이 책에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2점이 수록돼 있다. 베버 총아빠스는 또 한국 문화재 수집가였다. 유명한 ‘겸재 정선 화첩’뿐 아니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한국 관련 민속품이 그의 수집품이다.<사진 5>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선교사로 활동하다 1956년 4월 3일 리템보에서 선종, 페라미호 수도원 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선교 사상은 선교지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 나라의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는 마음이 따뜻한 한 문화인으로 한국 문화의 풍요로움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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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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