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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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앙의 산실이자 대관식 거행된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51. 프랑스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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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노트르담 대성당과 팔레 뒤 타우(Palais du Tau). 1991년에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옛 주교궁인 타우궁(현재 대관식 박물관), 성 레미지오의 무덤이 있는 옛 생 레미 수도원(현재 시립미술관)이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타우궁은 주교궁의 평면도가 그리스어 문자 타우(T)와 비슷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출처=셔터스톡

요즘 전쟁은 총칼로만 치르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전장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SNS 짧은 영상과 해시태그가 스마트폰 화면을 채웁니다. 지금 우리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전쟁은 이미지로만 기억되고 해석됩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정당성마저도 강렬한 이미지를 쥔 쪽이 가져가는 것 같습니다. 전장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고 자기 위주로 편집해 전 세계로 퍼뜨려 심리전·선전전을 펼치는 것도 그 때문이겠죠. 10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도 그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1914년 가을, 포성이 프랑스 북부의 하늘을 갈랐습니다. 독일군 포격으로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의 거대한 고딕 지붕은 불길에 휩싸였지요. 사흘간 이어진 화재에 첨탑은 무너지고, 스테인드글라스는 녹아내렸으며, 성당 내부는 잿더미로 변했지요.

프랑스 정부는 즉시 이 사건을 “야만이 신앙을 공격했다”고 규정하며, 불타는 대성당 사진과 삽화를 전 세계에 뿌리며 독일의 잔혹함을 부각했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은 곧 전쟁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독일 정부는 성당이 관측소로 사용되었다고 변명했지만, 이미 대중에게 독일은 악당으로 각인됐습니다. 선전전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셈이었죠.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13세기 프랑스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주교좌 성당이다. 길이 149m, 너비 30m, 내·외부 높이 최대 38m, 약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옛 로마네스크 성당(원 안의 모습)의 화재 후 1211년 착공되어 14세기 무렵 완성되었다. 81m 높이의 두 탑과 2300여 개의 정교한 인물상, 빛으로 가득한 내부가 특징이다.

프랑스의 영적 수도 랭스

사실 프랑스가 발칵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은 여느 대성당이 아니라 프랑스 정통성과 직결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5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시조 클로비스 1세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식에 흰 비둘기 모습을 한 천사가 내려와 성유(聖油)를 담은 병을 성 레미지오 주교에게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주교는 하느님께서 왕을 직접 선택하셨다는 표징으로 그 기름을 왕의 이마에 발랐습니다.

이후 모든 프랑스 왕의 대관식은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마에 기름 바르는 예식과 함께 거행됩니다. 그 때문에 중세에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의 영적 수도’로 불리며, 신성한 왕권의 원천이자 민족 정체성의 중심이었습니다. 1914년 독일의 포격을 프랑스 역사와 신앙을 겨눈 공격이라고 비난할 만했던 겁니다. 아무튼 랭스 사례 이후 전쟁에서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집니다.
주 제대와 후진. 주 제단 아래 문양은 ‘성유병’의 전설을 나타낸다. 화재로 파손된 조각 일부는 ‘상처의 기억’으로 보존되어 있고, 일부 벽면과 바닥은 전쟁의 흔적을 남기려 원래 재료와 구분되도록 약간 밝은 돌로 복원했다. 2019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당시, 프랑스 사회는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경험을 재건의 모델로 삼았다.

샴페인의 본고장

랭스로 가는 열차는 파리 동역에서 출발합니다. TGV의 차창 너머로 대도시의 회색빛은 점차 사라지고, 부드럽게 물결치는 샹파뉴 평원의 푸른빛으로 바뀝니다. 포도밭의 낮은 구릉 사이로 와인 향기가 바람에 실려오는 듯합니다.

랭스는 샴페인의 본고장인 프랑스 북동부의 샹파뉴 평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샴페인 회사의 지하 저장고 ‘크라예르(Crayères)’는 도시의 명소로 시음 프로그램으로도 유명하지요. 이곳이 세계적 샴페인 생산지가 된 건 도시를 굽이쳐 흐르는 벨강 덕분입니다. 물길은 교통과 상업의 기반을 제공했고, 강 주변 비옥한 충적토는 포도 재배에 적합한 토양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은 도심 한복판인 그 강 북쪽의 낮은 언덕에 있습니다. 랭스역에 내리면 큰길이 중심가로 이어져 있고, 양옆으로 19세기풍의 상점들과 카페가 들어서 있습니다. 길을 따라 학생들이 탄 트램이 오갑니다. 나지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잠시 후 길 끝으로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의 묵중한 두 탑이 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그리스도의 희생·랭스의 역사를 주제로 한 마르크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좌, 1974)와 대성당 봉헌 800주년을 기념해 이미 크뇌벨이 제작한 현대 추상 스테인드글라스(우, 2011).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후진에는 두 현대적인 창이 한 공간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잔 다르크 소성당의 창도 크뇌벨 작품이다.
서쪽 정면의 미소 짓는 천사 조각상(1240~1250년경). 1차 세계대전 중 포격으로 파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머리 원형은 팔레 뒤 타우에 소장되어 있다. 천사의 미소는 전쟁의 상처를 넘어선 신앙과 희망의 표징으로 남아 있다.

빛으로 다시 태어난 프랑스 왕가의 성소

현재의 대성당은 1211년경에 착공되어 약 80년 동안 지어진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걸작입니다. 이전의 로마네스크 대성당이 1210년의 화재로 소실된 뒤, 왕가의 성소를 새 시대의 옷을 입혀 다시 세운 것이지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회색빛 건물이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입니다. 성당 정면은 중앙의 ‘최후의 심판’ 포털, 왼쪽의 ‘성모 마리아’ 포털, 오른쪽의 ‘성 안나’ 포털이 신앙 이야기와 역사적 정체성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건물 곳곳에 전쟁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중앙 포털 왼편 기둥에 조각된 ‘미소 짓는 천사’는 포격으로 한쪽 날개가 약간 부서진 모습인데 그 표정이 천상보다 지상에 가깝습니다.

성당의 거대한 청동 문을 밀고 들어서자, 바깥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높이 38m 천장까지 수직으로 뻗은 돌기둥을 따라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젖혀집니다. 그 끝에는 수백 년 동안 같은 자리를 비춰온 빛이 있습니다. 색은 시간의 방향에 따라 변합니다. 아침의 빛은 20세기에 복원한 동쪽 후진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과해 주 제단을 비추고, 오후의 빛은 13세기의 서쪽의 큰 장미창으로 돌아와 다채로운 색으로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특히 마르크 샤갈의 청색과 자색이 어우러진 현대식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인데요, 빛이 성당의 회색 돌벽에 닿을 때면 공간 전체가 한순간 푸른 숨결로 물드는 듯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는 곧바로 대성당 복원을 시작했습니다. 부서진 돌과 깨진 유리창 하나까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자선가 록펠러의 통 큰 기부도 도움이 되었지만, 실제로 대성당을 다시 세운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참여한 지역 교회 공동체의 헌신이었습니다. 지난 2019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로 무너졌을 때, 프랑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랭스를 떠올렸을 겁니다. 파괴는 일시적이지만, 믿음은 영원히 이어집니다.
 
<순례 팁>

※ 파리 동역→랭스.(TGV 50분 소요) 역에서 대성당까지 도보로 8분. 대성당 바로 옆 옛 주교궁 팔레 뒤 타우(현재 대관식 박물관), 1.5㎞ 떨어진 곳의 생 레미 수도원의 바실리카(수도원은 현재 생 레미 시립박물관)를 둘러볼 것.

※ 대성당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9:00· 11:00, 평일 8:00(토), 19:00(월-금) / 바실리카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08:45·10:30, 평일 12:15(화·수·금), 19:00(목)

※ 혼자 가시기 힘든 분을 위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마련한 2026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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