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마, 뒤에 카메라 있어!”
20일 가톨릭 등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낙태약 수입 계획을 규탄하며 집회를 열 때, 현대약품 일부 직원들은 그 상황을 지켜보며 웃었다. 그러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을 발견하자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어찌 보면 이처럼 낙태뿐만 아니라 조력 자살·보조생식술·동성혼 반대 등 생명 윤리에 대한 교회의 호소를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지난해 12월 3일 계엄사령부의 포고령을 읽던 중이었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처단한다.” 나의 신체는 나만의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의 신체에 대한 권리가 나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할리우드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배우 크리스 프랫이 최근 한 시상식에서 한 “우리가 즐기는 자유 같은 은혜조차 누군가의 피로 얻어진 것”이라는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집 밖을 나갈 때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당연하지 않을 때가 머지않은 역사 속에 있었다.
먹고 살기 좋아지면서 더 나은 권리에 목말라할 수 있다. 그러나 얻으려는 권리가 사회 근간을 흔든다면, 지금 누리는 것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 여기서 근간이란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 불리는 생명권이다. 당연하게 살아 숨 쉬는 데 어떤 희생이 따르는지 생각해보면, 생명 운동가들을 우습게만 볼 수 있을까?
낙태라는 화살은 태아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생명 경시는 가장 약한 존재를 향한다. ‘죽을 권리’라고 하지만, 돈이 없어 돌봄과 치료에서 소외되는 노인과 환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현상은 이미 조력 자살을 합법화한 나라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짓밟힌 생명의 가치는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