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전문가의 감 김에 순례] 58. 체코 벨레흐라드 성모 승천·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준바실리카
폰트 작게폰트 크게인쇄공유
×
모라비아 살라슈카 강가의 작은 마을 벨레흐라드. 1205년 시토회 수도원이 세워지며 형성된 순례지로, 밝은 외관의 준바실리카와 수도원 건물이 마을의 중심을 이룬다. 19세기 이후 치릴로·메토디오 기념 순례가 확산되며 체코 국가 순례의 무대로 자리 잡았다. 올로모우츠 대교구의 주요 성지로 7월 5일 순례의 정점을 이룬다.
한 해가 시작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자주 일어나곤 합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건이 배낭여행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새 달력을 걸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국가로 나뉜 일이었습니다. 동유럽 민주화 후 연방 운영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생긴 결과였습니다. 경계선이 생겼지만, 그 땅의 삶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두 나라를 여행하면 별 차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20세기에 한 국가의 틀에서 제도와 일상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과거에 모라비아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언어와 문화가 오가던 시간이 축적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있었습니다. 9세기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가 슬라브어로 복음을 전하며 생긴 신앙과 그 기억입니다. 그 결실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체코 벨레흐라드(Velehrad)입니다.
벨레흐라드 성모 승천·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준바실리카와 옛 시토회 수도원 단지. 1890년부터 예수회가 순례자와 본당 사목을 맡고 있다. 왼쪽이 1928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준대성전으로 지정된 수도원 성당이며, 성당 앞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는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뒤의 건물은 가톨릭 김나지움과 기숙사, 사회복지시설로 쓰고 있다.
슬라브 복음화의 성지
벨레흐라드는 올로모우츠대교구의 주요 성지이자 체코 국가 순례지입니다. 동유럽의 언어·문화·정체성에 깊이 뿌리내린 복음의 번역과 토착화 정신을 한데 품은 곳이지요. 벨레흐라드의 뜻은 ‘큰 도시’이지만, 실제로는 체코 동부 살라슈카 강가에 자리한 조그만 마을입니다. 9~10세기 모라비아 왕국의 중심지이자 요새였던 스타레 메스토(옛 지명 벨리그라드)와 가까운데, 벨레흐라드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듯합니다.
슬라브족의 나라인 모라비아 왕국은 중세 초 중부 유럽의 중요한 축으로 프랑크 왕국과 경쟁하면서 동로마 제국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이 일대는 빈·보헤미아·브라티슬라바·헝가리 방면을 잇는 길목이었기에, 여러 언어와 문화·관습이 층층이 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9세기 중엽, 라스티슬라프 왕은 라틴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자신들을 가르칠 선교사를 원했습니다. 863년경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비잔티움에서 파견됩니다. 치릴로는 최초의 슬라브계 문자 체계인 글라골 문자를 만들어 복음서·전례서를 슬라브어로 옮겨, 이곳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키릴 문자는 훗날 제자들이 이를 정비·확산시킨 것이죠. 하드리아노 2세 교황은 슬라브어 전례를 승인했고, 메토디오는 대주교로 임명되어 모라비아 복음화에 앞장섭니다. 이 기억이 오늘날 벨레흐라드 국가 순례 전통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준바실리카 내 그리스도교 일치의 성모 소성당과 팔라디움. 1985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모 팔라디움 앞에서 교회 일치를 위해 기도했고, 바실리카에 황금 장미를 수여했다. 공산권이 민주화된 후인 1990년 4월 22일, 교황은 다시 벨레흐라드를 방문해 미사를 봉헌했다.
벨레흐라드 시토회 수도원
마을로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차분해집니다. 창밖에는 낮은 구릉과 들판, 모라비아 특유의 완만한 지형이 이어집니다. 도로 끝에 밝은 색조의 성당 쌍탑과 수도원 건물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수도원 광장에 들어서면 역사의 층위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벨레흐라드 수도원은 1205년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와 올로모우츠 주교 로베르트가 시토회 수도자 12명을 불러들이면서 시작됩니다. 수도자들은 황무지를 개간했고, 수도원을 돕던 세속 공동체가 점차 마을로 형성되었습니다. 9세기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던 땅에 시토회를 중심으로 복음의 열매를 맺기를 꿈꾸던 마음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수도원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1421년 후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도자들이 희생되었고, 1681년에는 큰 화재가 겹칩니다. 이후 약 반세기 재건 끝에 오늘 우리가 보는 바로크 양식의 외관이 형성됩니다. 1784년 요제프 2세의 결정으로 수도원은 폐지되지만, 19세기 중반 민족의식이 고조되며 치릴로·메토디오 공경이 되살아나면서 벨레흐라드는 다시 주목받습니다.
벨레흐라드 준바실리카. 길이 약 86m이며, 측면 통로를 따라 14개의 소성당이 조성되었다. 천장 프레스코화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모 승천을 주제로 하며, 한쪽에는 1421년 후스 군대에 의해 수도자들이 희생된 사건을, 다른 쪽에는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를 초대한 모라비아 군주의 세례 장면을 담았다.
벨레흐라드 수도원 마당 북쪽 담장에 조성된 ‘성인들의 갤러리’. 길이 70m 높이 6.5m의 벽돌 감실 8칸에 17세기 말 준바실리카 정면에 있던 성 베네딕도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조각상을 성당 마당으로 옮겨 순례로를 따라 쌍으로 배치했다. 하얀 건물은 교회 일치의 상징으로 동방 전례를 위한 이코노스타시스가 설치된 주님 공현 소성당인 ‘치릴카’이다.
교회 일치를 꿈꾸는 장소
성당 안은 길게 뻗은 중앙 신랑 좌우로 14개의 측면 소성당이 이어집니다. 밝은 바로크 장식 이면에는 시토회가 즐겨 쓰던 로마네스크·고딕의 평면 감각이 남아 있어, 이곳이 본래 수도자들의 공간임을 알려줍니다.
천장 프레스코화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모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수도원 성당의 주보는 원래 시토회 전통대로 성모 승천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벨레흐라드는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유산을 기념하는 순례 중심지로 급부상합니다. 두 성인의 모라비아 도래 1000주년이었던 1863년 국가 순례는 지역 행사를 넘어 전국적 규모로 팽창해 순례자 50만 명·성직자 1758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메토디오 선종 1000주년인 1885년에는 150만 명이 순례했다고 하지요.
20세기 초에는 교회 일치 논의를 담아내는 장소로도 자리 잡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비오 11세 교황은 1928년 이곳을 준대성전으로 지정했고, 1932년에는 두 성인을 공식적으로 공동 수호 성인으로 삼았습니다. 또 체코는 1990년부터 7월 5일을 국가 공휴일로 정해 두 성인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날이면 주교단과 교황청 대표가 바실리카 앞에서 공동미사를 봉헌하고, 동방 교회 대표들도 정기적으로 참례합니다.
벨레흐라드에서 복음이 책 속의 글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삶 속으로 들어오며 자라난 역사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두 성인이 한 일은 단순히 번역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전하고, 그 언어로 기도하고 살아가게 한 일이었지요.
우리에게도 그런 번역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가정과 일터로, 작은 행동으로 옮겨놓는 일 말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이 성탄의 빛을 일상의 길로 이어 주듯이, 이곳의 순례가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계기가 되길 빕니다.
<순례 팁>
※ 프라하·브루노에서는 스타레 메스토까지 기차로 이동 후 버스(No.375)나 택시로 벨레흐라드로 이동(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