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 양심적 낙태 거부권, 현실성 있나
발의된 개정안들, 거부 제한 조항 없지만
낙태에 건강보험 적용되면 거부 어려워
의사의 자기결정권 온전히 작동되려면
낙태 합법국에서도 의사 거부권 인정
생명 선택시 부담 경감하는 구조 필요
“흔히 ‘산부인과 왜 갔어?’라고 하지만, 사람의 인생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할 수 있는 너무 멋있는 과예요.”(KBS ‘옥탑방 문제아들’ 중 추성일 산부인과 전문의)
“의료대란 때 자궁 근종이 있으면서도 임신한 환자가 응급실에 올 때마다 제가 불려 나갔어요. 그 태아가 예쁜 딸로 건강히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 산부인과 김찬주 교수)
김찬주(아가타) 교수는 지금도 초음파 화면 속에서 생명을 확인하는 순간이면 눈물이 난다고 말한다. 수십 년 경력의 의사에게도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은 여전히 벅찬 일이다. 대한민국 모든 생명의 산파 역할을 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 생명의 신비를 ‘소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 그 소명은 점점 더 어려운 선택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입법 공백이 이어지면서 낙태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상태가 됐다. 가톨릭교회는 수정 순간부터 인간 생명이라며 낙태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지만, 현실에서는 헌재의 결정을 이유로 낙태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의료 현장은 또 다른 질문과 마주했다.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는 선택은 보호받고 있는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7년, 제16회 생명 주일(5월 3일)을 맞아 의료 현장에서 양심에 따라 낙태를 거부하며 살아가는 의사들의 현실을 짚어봤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 신생아실. 뉴시스
위기의 의사들
“의사의 거부권을 인정하면 도리어 낙태 시술을 받고자 하는 여성의 접근성을 방해하는 장벽이 될 겁니다. 낙태 시술을 거부하는 의사는 의사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낙태’를 둘러싸고 여성의 접근권과 의료인 양심권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지난해 8월 국회에서 열린 ‘입법 공백 해소를 위한 인공임신중지(낙태) 토론회’에서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나영 대표는 “세계보건기구(WHO)도 의료인의 거부로 인해 낙태 접근성이 제한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문제는 이런 발언이 개인 의견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제22대 국회에 발의된 낙태 관련 모자보건법은 모두 6건. 이 중 의사의 거부권을 명시적으로 제한하는 조항은 없지만, 의료계에서는 제도 변화에 따라 현실적으로 낙태 시술 거부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회장은 “병원은 합법적인 진료를 거부하기 어렵다”며 “특히 건강보험이 적용될 경우 의사는 환자를 진료할 의무를 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 발의된 법안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3건은 낙태 시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법과대학 음선필 교수는 “현행 의료법 제15조 1항은 의료인 등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나 조산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며 “낙태 합법화가 될 경우 이 조항이 적용되는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교회가 지속해서 낙태 문제와 관련해 ‘의사의 양심적 거부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한국 주교단은 3월 12일 성명을 발표하고 “의사의 양심을 존중하고 ‘생명을 살리는 병원’을 보호해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주교단은 “의료인의 기본 양심에 충실해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거부하는 병원들을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며 “‘낙태하지 않는 병원’을 제도적으로 표시해 의료진에게는 생명 수호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사회적으로는 생명 살리기 문화를 넓혀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산부인과 전문 제일병원 신생아실. 뉴시스
낙태 시술 안 하면… 취업·진로 선택 부담
“굶더라도 낙태는 절대 못하겠다”며 전문의 시험을 마치고 1년간 ‘백수’였던 A 의사. 마찬가지로 전문의 자격은 얻었지만 “언니가 수녀인데, 어떻게 낙태를 하겠느냐”며 6개월 동안 병원 취직을 하지 못한 B 의사. 낙태 시술 여부는 실제로도 의료인의 생계를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장 차희제(토마스) 원장 역시 저출생 시대, 과거 낮은 분만 수가에다 수요 감소 속에 산부인과를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결국 피부과 진료로 전향한 경험이 있다. 이른바 ‘돈이 되는 시술’이었던 낙태를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 병원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현재 그는 경기도 양평에서 산부인과와 피부과를 병행 진료하고 있다.
차 원장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예전에는 분만 수가가 너무 낮아서 ‘개 분만비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나왔었다”며 “지금은 다소 나아졌지만, 낙태하지 않으면 산부인과 운영이 어려운 구조였고 출산율이 낮은 지역일수록 상황은 더 심각했다”고 말했다.
의료계 내부의 눈총도 견뎌야 했다. 한때 일간지 1면을 장식했던 ‘낙태 의사 고발 사건’에 가담했던 프로라이프 의사들은 산부인과의사회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낙태가 불법이었던 시절,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병원 3곳과 의사 8명을 검찰에 고발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2010년 1월 22일 창립해 많을 땐 100명 가까이 활동했던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사실상 와해의 길을 걸었다. 현재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의사는 2~3명 남짓이다.
그러나 지금도 의료 현장에서 조용히 양심을 지키는 의사들은 존재한다. 과거 프로라이프 의사회 회원이었던 한 의사는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의사는 병원 취직 때부터 낙태 수술을 하지 않는 조건을 피력해야 한다”며 “병원장이 이러한 가치를 이해해주더라도 병원 운영을 위해선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종교와 관계없이 태아를 생명으로 보고 낙태를 반대하는 의사들이 분명히 있다”며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더 힘들더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진료에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만약 양심적 거부권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지도 물었다. 의사 대부분의 답은 분명했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설마, 거부권 인정이 안 되겠느냐’는 낙관론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단호했다.
이러한 현실은 미래 의료 인력 수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전남대 의대생 C씨는 “산부인과는 이미 산모와 태아의 생명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큰 진료과”라며 “여기에 국가가 특정 의료행위를 강제하는 상황까지 더해진다면 진로 선택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순천향대 의대생 D씨 또한 “의사도 사람이기에 가치관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받으면 정신적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이는 의사를 ‘의료 기술을 제공하는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산부인과 기피 현상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지난해 서울아산병원의 2026년도 상반기 레지던트 1년 차 모집에서 산부인과 경쟁률은 0.63 대 1에 그쳤다. 열악한 근무 여건과 낮은 선호도에 더해, 가치관과 충돌하는 의료 환경까지 이어질 경우 생명을 탄생시키는 산부인과 의료 인력 부족은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안나 강릉의료원장은 앞선 국회 토론회에서 “의사의 낙태 시술 거부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지원율이 저조한 산부인과 의사의 씨를 말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저출생 현상 속에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22년 474개였던 전국 분만기관이 2024년 445개로 줄었다고 밝혔다. 2014년 675개에 비해서는 34.1 감소했다.
법 해석 둘러싼 쟁점
낙태 시술 거부권과 관련한 갈등은 결국 법과 제도가 답해야 할 문제로 이어진다. 홍익대 법과대학 음선필 교수는 “이미 낙태를 합법화한 많은 나라에서도 의사의 시술 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며 “법으로 명시하거나, 시술 기관을 별도로 두는 방식으로 의료인이 직접 참여하지 않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럼에도 법으로 의사의 낙태 시술 거부를 금지한다면, 헌법상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있는 만큼 종교나 양심의 이유로 시술을 거부하는 의사의 권리 역시 부인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도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음 교수는 “헌재가 의사의 자기결정권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취지를 고려할 때 의사의 자기결정권 역시 함께 논의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낙태 시술을 제공하는 의사를 처벌하는 것이 위헌이라면, 반대로 시술을 거부하는 선택도 자기결정권의 범위 안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음 교수는 다만 “의료법 제15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의사의 종교적 양심적 자유에 따른 거부권이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해석이나 판례가 없다”며 “이같은 혼란은 6년 넘게 이어지는 입법 공백이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낙태를 둘러싼 논쟁은 오랫동안 여성과 태아의 권리가 충돌하는 문제로 다뤄져 왔다. 그러나 의료진과 여성이 의료 현장에서 마주하는 상황은 다르다. 생명을 지키려는 선택이 개인 부담으로만 주어지는 한, 의사의 양심적 거부권은 온전히 작동하기 어렵다. 헌재 결정 이후 낙태를 둘러싼 제도 정비가 진행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마주한 과제는 단순한 허용 여부를 넘어선다. 결국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허용이 아닌 ‘생명을 향한 선택을 지탱할 구조’일 것이다.
의사의 양심마저 옥죄려는 가운데, 지난 2월 합계출산율이 0.93명으로 소폭 상승했다는 지표가 최근 나왔다. 정부는 출산 지원은 계속 늘리고자 노력하면서 이미 생명인 태아를 향한 살해행위에는 왜 다른 잣대를 들이미는지 아이러니하다. 생명을 존중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관된 조건과 제도를 갖추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