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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실 교우촌 순교 신앙, 외어공소로 이어지다

[리길재 기자의 공소(公所)를 가다] 18. 안동교구 문경본당 외어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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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문경본당 외어공소 전경. 높이 솟은 종탑이 골목길 어귀에서부터 보여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향소의 흔적 품은 늘목 마을 외어리

안동교구 문경본당 외어공소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외어3길 9에 자리하고 있다.

외어리(外於里)는 신라 시대 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잉을항향소’(仍乙項鄕所)가 있던 곳이다. ‘향소’는 시대에 따라 두 가지 의미의 행정구역으로 사용됐다. 신라·고려 시대에는 ‘특산물’을 생산하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향소는 금·은·동·철을 생산하는 금소·은소·동소·철소가 있고, 비단실과 비단옷감을 생산하는 사소(絲所)와 주소(紬所), 종이를 만드는 지소, 기와를 굽는 와소, 숯을 생산하는 탄소, 소금을 생산하는 염소, 먹을 만드는 묵소, 미역을 양식하는 곽소, 생강을 생산하는 강소, 물고기를 잡는 어량소, 차를 만드는 다소 등이 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문경 외어리 향소는 아마도 기와와 옹기를 굽는 마을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기와와 옹기로 유명한 외어리 구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 시대에는 고을 수령을 보좌하고, 마을을 규찰하던 자치기구 ‘유향소’(留鄕所)를 줄여서 향소라 부르기도 했다.

‘잉을항’(仍乙項)은 우리말로 ‘늘목’이다. ‘늘 다니는 길목’, ‘넓은 골짜기’를 가리킨다. 마성면 내어리(內於里)는 ‘안 늘목 마을’ , 외어리(外於里)는 ‘바깥 늘목 마을’이다. 따라서 외어리는 문경 마성면 바깥 넓은 골짜기에서 기와와 옹기를 굽던 마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외어공소 마당에 모셔진 성모상.

또 외어리는 마을 모양이 제비집 같다 해서 ‘연작사’(燕作舍)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어 주민들이 제비조차 굶어 죽는 곳이라며 스스로 ‘연작살’(燕雀殺)이라 낮추어 불렀다.

마성면에는 또 하나 ‘넓은(깊은) 골짜기’가 있다. 바로 상내리에 있는 ‘한실’이다. 백화산 서쪽 중턱 험하고 깊은 골짜기인 한실에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신앙 선조들이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이뤘다. 오늘날 한실 교우촌(성지)은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 칼레(1833~1884) 신부의 사목지로 소개되고 있지만 앞서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였다.

최양업 신부는 칼레 신부가 1861년 조선에 입국한 지 얼마 안 돼 선종했다. “새 신부(칼레, 리델, 조안노, 랑드르) 네 명이 조선에 입국했다(필자 주-1861년 4월 7일 서울 주교관 도착)는 소식을 주교님께서도 아마 들으셨을 것입니다. 원군이 절실히 필요했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사망(필자 주-1861년 6월 15일)한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신부는 6월 저를 보러 오던 중에 쓰러졌습니다. 저희에겐 크나큰 상실입니다.”(베르뇌 주교가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낸 1861년 8월 20일 자 편지)

최양업 신부가 한실에서 김 아우구스티노 가족에게 세례를 줬다. 청주 갈매골 양반으로 가톨릭 교리를 배우다 집안의 박해로 가족을 데리고 천주교인들이 사는 한실로 들어온 김 아우구스티노는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될 만큼 진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1866년 11월 19일 아들 토마스와 종손자 아우구스티노·안토니오·베네딕토·빈첸시오와 함께 체포돼 상주 진영에서 모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단출하게 꾸며진 외어공소 제단.

박해 속에 피어난 한실 교우촌의 믿음

칼레 신부는 1865년부터 페롱 신부를 대신해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을 담당했다. 그는 1866년 2월 한실 교우촌에 있을 때 베르뇌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소백산맥 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는 초가 15채가 있는데, 15채는 다섯 동네로 나뉘어 소백산맥 굽이와 줄기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습니다. (?) 저는 성사들을 다 받은 한실 교우들과 작별하고, 여름 은신처인 소학골로 가는 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은 한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실의 회장 및 지각 있는 교우 두 사람과 짜고 다른 교우들 몰래 한실의 다섯 동네 중 가장 깊숙한 동네로 숨었습니다. (?) 그동안 동료 선교사들은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칼레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 자 편지에서)

칼레 신부는 1866년 10월 페롱 신부와 함께 생존 선교사 중 마지막으로 한반도를 떠나 만주대목구로 피신했다. 한실 교우촌은 병인박해 때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김 아우구스티노 가족과 함께 서태순(베드로) 등 15명의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마성면 외어리는 지번으로 외어 1·2·3·4리가 있다. 외어공소는 외어리 중 가장 큰 4리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마을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기에 지금도 외어4리에는 개신교회가 없다. 이 마을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오직 외어공소뿐이다.
외어공소 현관. 입구에서부터 먼저 한 톨 없을 만큼 깔끔하게 정돈된 것이 이곳 교우들이 공소를 얼마나 정성스레 보존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정성으로 지은 공소, 마음으로 이어온 신앙

외어공소는 1964년 여름 설립됐다. 하지만 공소 설립 이전부터 외어 마을에는 가톨릭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돌밭이었던 외어4리에 박해시대 때부터 있던 옹기굴에서 신앙생활을 함께했다. 일제 때 점촌에 기차역과 문경 일대 탄광 광업소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외어 4리에 10여 가호뿐이었다. 이 시기 질구리에 살던 최명광(루도비코)과 이 요한, 그리고 마원에 살던 교우 한 명이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1964년 봄부터 예비신자들이 늘어 이철하(요한)씨 가정에서 공소 예절을 시작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해 여름 외어공소가 설립됐다. 외어공소 초대 회장이 된 이철하씨는 방 한 칸으로는 부족해 아예 자신의 집 방 두 칸을 터서 공소로 사용했다.

외어공소 교우들은 1970년 동네 가운데 논을 매입해 공소 땅을 확보하고 모두가 힘을 보태 건물을 스스로 지었다. 공소 건물을 짓는데 돈이 부족해 교우들이 직접 손수레를 끌고 강에 가서 모래를 파 싣고 와 벽돌을 한 장 한 장 직접 쌓았다. 비록 전문 건축 기술은 없지만, 정성으로 지은 외어공소는 1972년 8월 당시 문경 본당 주임 문세화 신부 주례로 봉헌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외어공소는 교우들의 정성으로 지은 집어서 그런지 따뜻하고 정감이 간다. 또 단아하고 기품도 있다. 마을 골목길로 들어서면 종탑이 보인다. 공소 마당은 자갈을 깔아 놓아 깔끔하다. 공소 건물 왼편에는 ‘성모상’을 조성해 놓았고 그 뒤로 소나무 두 그루를 심어놓았다.

일반 가정집 형태의 외어공소는 50년이 넘은 건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윤이 난다. 공소 교우들은 “기초가 약해 언제 무너질 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지만, 회중석과 마루가 반짝일 만큼 어느 한 곳 교우들이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여겨질 만큼 깔끔하다.

공소 제단도 제대와 십자가, 성모상으로 단출하게 꾸며놓았다. 채광이 잘 되게 양쪽 벽에 2개씩 창을 내놓았고 3면 벽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해 놓았다. 현관 한 켠에는 공소 예절서와 교회 서적, 교무금 봉투, 실내화 등이 잘 정돈돼 있다.

문경본당 외어공소는 비록 1960년대 중반에 설립된 공소이지만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1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마성면 한실 교우촌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가난 속에서도 자립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유대감 깊은 신앙공동체이다.

리길재 전문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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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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