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스쉬르포르망 생 식스트 바실리카. 건축가 피에르 마리 보상의 설계로 1862년부터 기존 12세기 로마네스크 본당에 네오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증축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6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곳을 사목 방문해 주민들과 사제와 신학생들을 만났다. 1997년 준대성전으로 지정됐다.
레오 14세 교황은 2026년 성소 주일 담화에서 “(성소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하느님이 무상으로 주신 선물을 발견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소가 외부에 주어진 어떤 특별한 역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심어두신 아름다운 선물을 기도와 관상·경청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순례지는 이런 성소의 내적 차원을 묵상하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한 시골 본당의 사제가 날마다 신자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공동체를 다시 하느님께 돌려세운 사랑의 현장입니다. ‘아르스의 성자’로 불리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1818년부터 1859년 선종할 때까지 사목한 본당으로, 프랑스 리옹 북쪽의 작은 마을 아르스쉬르포르망(Ars-sur-Formans)의 생 식스트 바실리카입니다.
바실리카 익랑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의 성해함(좌)과 심장 소성당 성해함(우). 벽면을 가득 메운 봉헌패가 아르스를 찾은 순례자들의 오랜 전구를 증언한다. 1929년 비오 11세 교황은 성인을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1930년에 바실리카 밖에 건립된 심장 소성당에는 전 세계 사제들의 이름을 적어 전구를 청하는 노트가 비치돼 있다.
혁명으로 신앙의 불이 꺼진 공동체의 부활
아르스는 프랑스 남부 최대 도시인 리옹에서 30㎞ 남짓 떨어진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입니다. 손강 유역의 비옥한 구릉과 돔브 고원의 경계에 자리한 마을로 리옹에서 차로 30분이면 닿습니다. 리옹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돔브 지방 특유의 저지대와 못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잠시 달렸을까, 손강의 지류인 작은 포르망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 도착합니다.
아르스의 역사는 의외로 깊습니다. 이미 969년 문헌에 이름이 등장하는데, ‘불타 버린 곳’을 뜻하는 ‘아르사(Arsa)’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9세기까지는 여느 마을처럼 역사의 굴곡 속에서 영주가 바뀌고, 전란을 겪었던 평범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성 비안네가 사목하던 옛 본당 내부. 소박한 단일 본랑 끝으로 19세기 바실리카의 제대 공간이 이어진다. 중세 마을 성당과 후대 순례 성당이 한 몸처럼 맞물린 구조다. 옛 본당의 주 제대는 왼쪽 성 요한 세례자 소성당에 옮겨졌으며, 성인이 지키던 고해실은 옛 제의실에 보존되어 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려는 사제의 헌신
비안네 신부는 1786년 리옹 근교 다르딜리의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건초더미로 창을 가린 채 몰래 미사에 참여하며 사제의 꿈을 키웠지요. 그렇지만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버거웠습니다. 라틴어 앞에서 번번이 막혔고, 군 복무 문제로 방황하기도 했습니다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815년 그 모든 문턱을 넘고 사제품을 받습니다.
첫 보좌를 거쳐 1818년, 그가 부임한 아르스본당은 신앙과 동떨어진 분위기의 마을이었습니다. 주일에는 영성체와 고해성사는 안중에 없었고, 술집과 도박판에 빠져 있었지요. 그러나 신부는 좌절하지 않고 예수 성심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신자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갔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내놓고는 정작 본인은 굶기 일쑤였습니다. 무엇보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오랜 시간 고해실을 지키며 신자들을 기다렸고, 그들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빛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어둠은 걷히고,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돌아섰습니다.
바실리카의 주 제대와 팔각 돔. 비안네 신부가 생전에 승인한 계획에 따라 증축된 새 성당의 중심부다. 돔 프레스코는 성인이 하느님의 전구와 위로를 체험해 각별히 공경했던 순교자 성 필로메나의 생애를 담고 있다. 황금빛 청동 제대와 강론대·의자는 선종 150주년인 2009년에 새롭게 제작 봉헌된 것이다.
초심을 품은 바실리카
마을 중심에 이르면 생 식스트 바실리카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비안네 신부가 미사를 드리던 12세기 로마네스크 본당을 그대로 둔 채, 뒤편에 더 큰 바실리카를 이어 붙였기 때문입니다.
비안네 신부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청하러 아르스를 찾아왔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새 성당을 계획했지만, 실제 공사는 그가 1859년 선종한 뒤 1862년부터 본격화됐습니다. 이때 기존 성당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은 본당 신부의 사랑이 깃든 일터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로 신자들의 회개가 일어났던 기억을 보존하려는 배려였습니다.
그래서 바실리카에 들어서면 오래된 마을 성당의 정취를 먼저 느낍니다. 옛 제의실에는 비안네 신부가 하루 16~18시간 가까이 머물며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던 고해실이 남아 있습니다. 몇 걸음 더 나아가 옛 주 제대가 있던 곳에서 새로 증축한 연록색 돔을 얹은 네오비잔틴 양식의 넓은 공간이 펼쳐집니다. 마치 성찬의 전례로 영적인 눈을 뜨듯 시야가 확 트입니다.
41년간 사용한 사제관 부엌. 귀족 부인이 내준 집이었지만 값나가는 가구를 돌려보내고, 본당 신자들과 같이 가난 속에 살기를 택한 성인의 삶이 배어 있다. 생전 이곳에서 밀가루와 물로 만든 팬케이크를 직접 준비하며 극기의 삶을 살았다.
부르심은 누군가의 곁에 오래 머무르는 사랑
흰 돌벽과 높은 천장, 화려한 채색 장식, 그리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성해 앞에 머무는 순례자들의 침묵이 한데 겹칩니다. 이어 성인이 41년 동안 살았던 생활 공간에서 그의 가난하고 단출한 유품을 마주합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사제는 나를 위한 사제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사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며, 맡겨진 양 떼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사제 성소는 직분의 영예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의 형태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사제를 교회와 인류에게 주어진 큰 은총으로 묵상한 이유도 여기 있을 겁니다.
부르심은 멀리 반짝이는 이상이 아니라, 오늘도 누군가의 곁에 오래 머무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제뿐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성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하느님의 초대임을 묵상해 봅니다.
<순례 팁>
※ 리옹 파르디외역에서 빌프랑슈쉬르손역까지 기차(TER) 이동 후 택시나 버스(A19)로 아르스로 이동.(기차+버스 50분)
※ 바실리카 미사: 주일 및 대축일 8:00·9:30·18:00, 평일 8:45·11:00· 18:00. 성인의 집과 심장 소성당 방문: 여름 7:30~19:30, 겨울 7:30~18:00. 순례자 숙소와 식사는 라프로비당스(La Providence),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의 생애는 순례자 센터의 영상이나 그레뱅 밀랍 인형박물관 전시를 통해 확인
※ 혼자 가시기 힘든 분을 위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6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