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화신문 38주년을 맞이하여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가톨릭평화신문 1면 오른쪽 상단에는 숫자 하나가 적혀 있는데 그 숫자를 보면 이번 신문이 몇 번째 발행된 평화신문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근 2000에 가까운 숫자가 찍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되는 신문이니까 약 2000주 동안 평화신문이 발행되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2000주를 연 단위로 환산하면 약 38년입니다. 미래로 이어질 그 38년간 가톨릭평화신문은 우리 성당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령의 활동을 세상에 알려왔습니다. 평화신문은 약 2000주 동안 교회 안팎의 중요한 사안이 어떤 것인지 보도해왔고, 교회의 노력에 반하는 세상과 현실의 부조리를 지적해 왔습니다. 또한 평화신문은 그 오랜 시간 세계 교회 여러 곳에서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어떻게 위대한 신앙을 증언하고 있는지를 전해왔습니다.
세상의 눈은 성령의 임재로 인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의 ‘뉴스 가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상의 눈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평화신문은 세상의 그 어느 일보다 중요한 일들을 ‘새로운 소식’으로 보도해 온 것입니다. 이런 일을 38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느님과 교회의 도움,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입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므로, 이 교회의 모든 일은 특별히 노력하여 알리지 않아도 저절로 알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 미디어에 관한 사목 훈령 「일치와 발전」 17항과 117항이 바로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움직임과 함께 움직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각 시대 인간의 상황에 적응해야 합니다. 선한 의도와 올바른 양심만으로 신뢰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도덕적 가치와 타당성은 그 주제나 내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방식, 말하고 다루는 방식, 심지어 커뮤니케이션 설계의 대상인 청중까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소식을 그 시대 문화와 상황에 따라 알리려면, 그 알리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고려와 시도가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서 교회가 당대의 커뮤니케이션 기술, 신문이나 SNS와 조우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교회는 종이신문과, 이 종이신문이 중심이 된 전자화된 소식 전달을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는 더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 탄생부터 ‘강학의 전통’, 즉 문자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연구하고, 듣고, 전하는 교회의 방식을 매우 특별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서학에 대한 책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소리를 포함한 영상의 시대인 것은 틀림없지만, 어떤 소식들은 여전히 ‘문자’를 통해야 그 분위기가 객관적으로 전파되기도 합니다. 이 종이 위에 인쇄된 보도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과 경험의 틀, 나아가 행동 지침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38년을 걸어오다 보니, 여기저기 해지고 낡고 약해진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쉬운 부분을 개선해 나가며, 오히려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굳은 믿음이 더욱 새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요란스럽지 않게, 세상 어두운 곳 구석구석에 조용히 배달되고 있는 가톨릭평화신문이 제 책상 한켠에 놓여 있습니다. 스마트폰처럼 멋지고 값비싸게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이 신문이 간직하고 있는 은근한 위력에 저 또한 힘을 얻습니다.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성기헌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