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을 잘 모르고 살았다. 아버지·어머니는 부지런하셨고, 자식들 남 부럽지 않게 살게 하려고, 밤늦게까지 평생 일만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퇴직할 즈음에 나는 서울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고, 나중에 청원자 휴가 때 가보니, 아버지께서 목포 경동성당에서 성 이레네오를 주보로 세례를 받으셨다. 엄마도 뒤따라 신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계속 성경공부 등을 하시다가 아예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에 등록해 큰오빠 집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며 2년을 다니셨다. 그리고 2002년경 선교사가 되어 영월 상동공소에 파견되어 열악했던 공소 건물을 고치기 위해 여기저기 도움을 받으셨고, 비가 샜던 지붕과 먼지로 뒤덮인 성전을 깨끗하게 보수하셨다.
아버지는 주일이면 공소예절도 하고, 밥도 짓고, 커피도 끓여 신자들과 드시곤 하셨다. 그땐 요즘처럼 성가 반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수원 유치원에 근무하던 시절, 수녀원에 전화해 음을 잡기 어렵다고 성가를 어떻게 부르는지 불러보라고 하셔서 불러드리면 어설픈 음을 따라 부르셨다. 그 상황에 대해 함께 살던 수녀님들이 두고두고 배꼽을 잡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영월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휴가를 가면 버스가 어디서 정차하는지 모르셔서, 엄마는 공소 근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버지는 밤 운전을 해가며 태백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갔다 돌아오신 적도 있다. 밤늦게까지 딸이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이쪽저쪽에서 기다리는 두 분을 보고서야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후 고향 근처 전라도 압해도 신장공소로 옮겨 1~2년 신자들과 함께하며 선교사로 지내셨다. 건강이 안 좋아져 은퇴하신 후엔 목포 옥암동에서 사셨다. 옥암동성당 성전 신축 땐 음식을 만들어 수익을 봉헌하고, 폐휴지와 빈 병을 수거해 보태셨다.
요즘 거울을 보면 이마에는 냇물처럼 잔주름이 흐르고, 얼굴에는 북두칠성처럼 큰 점들이 또렷하게 박혀있는 내 모습을 본다. 눈도 작아져 아버지 나이 드셨을 때 눈과 똑 닮았다. ‘세월은 못 막는구나’를 깨닫고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실 때 “네, 여기 있습니다” 하며 하늘나라로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천천히 행동으로 옮기며 지낸다. ‘비움의 미학’을 살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