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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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260g의 기적과 태아의 생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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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연히 10여 년간 근무했던 병원의 인터넷 채널에서 ‘260g 초극소 미숙아’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신생아중환자실(NICU)에서 근무하면서 인큐베이터 안의 이 작은 아가들을 돌보고, 백일잔치를 하고, 가족들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퇴원시켰던 기억들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미숙아(이른둥이)’는 의학적으로 임신 37주 미만 혹은 2.5㎏ 미만으로 태어난 아기를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아기의 생존에 결정적인 임신 주수와 체중에 따라 이를 세분화하고 있는데, 보통 28주 미만이나 1㎏ 미만으로 태어난 아기를 ‘초극소 미숙아’라고 부른다.

나에게 신생아중환자실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매일 확인하는 곳이었다. 첫째를 임신 중이던 당시, 나의 뱃속에 32주 된 아이와 한 달 전에 태어나 이제 ‘32주’가 된 미숙아를 품에 안고 수유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작디작은 생명이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고 씩씩하게 우유를 빠는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기적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이러한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가고 있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대체 법안이 마련되지 않으면서, 태아의 생명권은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였다.

특히 최근 발의된 「모자보건법 일부 개정 법률안」들은 낙태 허용 한계를 삭제하는 등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출산권을 동시에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해야 한다. 의학적 관점에서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염색체에 계획된 고유한 방식에 따라 성장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가톨릭교회에서도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한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고 명확히 전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가’ 혹은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논리로 생명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만약 생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가 맞는다면, 중환자실에서 이른둥이를 살리려 밤낮으로 애쓰는 의료진과 부모들의 노력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우리나라의 미숙아 출생비율은 6.7로 유럽의 선진국보다 높으나, 전국에 신생아중환자실을 운영하는 기관은 102곳뿐이다. 필요 병상 수의 71 수준이다. 2026년 국립보건연구원 보고에 따르면, 국내 극소저체중아의 생존율은 무려 90에 달한다. 의료 현장에서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생존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태아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주수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혹은 사회적 양육조건이 충분하지 않다는 외적인 요인으로 생명을 중단시키려 하고 있다. 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조차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다. 의료 기술은 생명을, 삶을 향하는데 법은 죽음을 허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주먹만 한 아기가 스스로 숨을 쉬고 우유를 먹는 모습, 체중이 겨우 20g 늘었다는 소식에 함께 기뻐하며 울고 웃던 부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그 현장에서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지 배웠고, 그 체험을 미래 세대인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아기의 생존 가능 여부나 양육시스템의 부재가 생명의 가치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태아를 ‘선택의 대상’이 아닌, ‘존엄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회복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사회 제도적 노력을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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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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