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본당은 안동교구 본당 가운데 가장 많은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성유·상괴·도태·민지·전곡·상신·쌍용·농암 8개나 된다. 이들 공소의 상당수는 1956년 점촌본당 신상철(아우구스티노) 전교회장에 의해 세워졌다.
신 전교회장은 문경 농암면 율수리 출신으로 5대째 가톨릭 신앙을 이어온 구교우였다. 부산교구 신동원(다니엘) 신부가 그의 막내 아들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 전교회장의 선조들은 상주군 웃갈골 깊은 산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로 숨어들어가 교우 7~8가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 포졸에 쫓겨 충북 괴산군 청천면 시거리 옹기점에 정착했다.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농암으로 이주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교우들이 많은 것을 보고 전교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로 고향 농암으로 내려와 이 동네 저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56년 점촌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아르놀도 렌하르트 신부의 눈에 띄어 전교회장으로 발탁, 오늘날 가은읍 일대뿐 아니라 안동교구 여러 지역에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 공소를 설립했다.
성유리는 신라 전기 축조한 토성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부터 인심 좋고 후덕하기로 소문났다고 한다. 성유공소와 마을 전경.
1957년 신상철 전교회장에 의해 시작
가은읍(加恩邑)은 문경시 서북쪽 산간 지대에 자리한 유서 깊은 고을이다. 지세를 보면 북쪽으로는 백두대간 줄기인 희양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동서로 영강(潁江)이, 남북으로 양산천(陽山川)이 흘러 삼국시대 때부터 인심 좋고 후덕해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졌다. 옛 이름은 가해현(加害縣)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750년께) 때 고령군(오늘날 함창)에 예속됐고, 고려 현종(1020년께) 때 가은(加恩)으로 이름이 바뀌어 상주군 속현이 됐다. 1973년 가은면과 상주시 이안면 저음리가 합쳐져 읍으로 승격됐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 초까지 문경 탄전 중심 광산 마을이었으나 폐광 이후 현재 주민들은 농업과 수려한 자연과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한 관광업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성유리(城踰里)는 신라 전기에 축조한 토성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뒷산 너머에 철을 생산하던 야철터가 있어 한때 ‘불무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안동교구 가은본당 성유공소는 문경시 가은읍 성유신기길 70에 자리하고 있다. 성유2리 노인·마을회관 맞은편이다. 성유공소는 1957년 신상철 전교회장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성유리에 살던 교우 오재구의 사랑방에서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주일이면 공소 예절을 했다. 신 전교회장은 성유리 상수도 설치와 4개 마을 진입로 공사, 수만 평에 달하는 농지 개간 등 마을환경 개선사업을 주도했다. 그는 극빈자들을 공사 인부로 쓰며 인건비로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 소속 가톨릭구제회 구제품인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줬다. 마을도 고치고 가난한 이들도 먹여 살리는 지혜로운 처사였다. 이 일로 신 전교회장은 군과 읍에서 감사패를 여러 번 받았다.
성유공소는 제대로 제단과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제대 옆 커다란 성모자상이 인상적이다.
창을 많이 내 채광을 좋게 해놓은 성유공소는 벽면 한 켠에 교우들의 사진과 이곳 출신 고 김동환 신부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사제를 배출한 작은 공소의 큰 결실
1957년 가은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에르네스토 지베르츠(한국명 지인수) 신부는 1959년 공소 대지를 매입, 1961년 공소 건물을 신축하고 성유공소를 설립했다. 장기택(야누아리오) 초대 공소회장이 40여 년간 봉사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공소 교우가 많이 줄어 지금은 10명 안팎이 공소에 나오고 있다.
성유공소는 사제도 배출했다. 고 김동환(라우렌시오) 신부다. 1946년 8월 성유2리 215번지에서 출생한 그는 1966년 2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리고 1973년 2월 첫서원을 하고 1976년 2월 종신서원을 했다. 더불어 같은 해 12월 8일 사제품을 받았다. 김 신부는 1982년 12월부터 5년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1984년 9월부터 1987년 9월까지 오클랜드 성 김대건 한인본당 설립을 도와 초대 주임으로 사목했다. 그해 12월 귀국 후 부산수도원 분원장 겸 부산 명상의 집 책임자로 있던 김 신부는 간암으로 1995년 9월 49세 나이로 선종했다.
성유공소 내부. 벽면과 바닥, 천장 모두가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폐쇄 위기 넘어 기도로 지켜낸 공동체
성유공소는 성유2리 마을 초입에 있다. 작은 벽돌집으로 지붕과 종탑은 함석판으로 마감돼 있다. 종탑 위에는 큰 십자가가 설치돼 있다. 지금도 공소 교우들은 종탑의 종을 울린다. 공소를 마주 보고 오른편에는 공터가, 왼편에는 주민들을 위한 운동기구들이 놓여있다.
성유공소는 지은 지 오래됐지만 내·외부는 깔끔하게 마감돼 있다. 외벽은 물론 내벽과 천장, 회중석도 새로 칠했다. 나무 바닥도 단단하게 새로 놓았다. 장식 없는 소박한 나무 제대가 제단과 회중석을 구분한다. 제대 뒤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 옆에 커다란 성모자상이 놓여 있다. 제대 뒤에 별실을 만들어 회합실로 꾸며놓았다.
공소 양측 벽면에 3개씩 창을 내고, 또 입구 벽면에 2개의 창을 내 낮 동안 채광을 좋게 해 놓았다. 양측 벽 창틀 위에는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를 꾸며놓았고, 창과 창 사이 벽면 한쪽엔 액자에 담아놓은 공소 교우들 사진과 이곳 출신 고 김동환 신부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동환 신부를 ‘김동완’ 신부로 잘못 표기해 놓은 게 아쉽다. 다른 한쪽에는 게시판이 설치돼 있다. 입구 옆 장식장에는 그리스도 왕 성상과 성모상이 오후의 낮은 햇살을 머금고 있다.
성유공소는 한때 교우수가 4명으로 줄어들어 폐쇄될 위기에 처했으나 “공소를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교우들의 간절한 기도로 지금까지 활동 공소로 남아 있다. 성유공소 교우들은 공소를 살리기 위해 매달 첫째 주 공소 예절을 마치면 집집이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며 우애를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