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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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선교사가 세운 신앙 터전, 전쟁의 상처 딛고 일어선 성지

[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89. 룩셈부르크 에히터나흐 성 빌리브로르도 바실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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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에히터나흐. 독일 국경 가까운 자우어(주레)강변에 자리한 인구 약 5600명의 도시로, 698년 성 빌리브로르도가 세운 수도원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중앙의 네 탑을 지닌 성 빌리브로르도 바실리카와 왼쪽의 옛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도시의 중심을 이룬다. 시 외곽에는 1~5세기 대규모 로마 빌라 유적이 남아 있고, 구시가지 위쪽 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 자리에도 로마 시대 흔적이 있다.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화요일이면 독일 국경과 가까운 자주어(주레)강변 작은 도시 에히터나흐에 특별한 행렬이 시작됩니다. 흰 셔츠에 검정 하의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어 흰 손수건을 맞잡고, 경쾌한 선율에 맞춰 좌우로 폴짝폴짝 뛰며 바실리카로 향합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에히터나흐 도약 행렬’로, 739년 이곳에서 선종한 성 빌리브로르도 주교를 향한 공경을 춤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중세에 간질처럼 몸이 떨리거나 경련하는 질병을 성인이 치유해 준다고 믿은 데서 비롯된 것 같은데, 지금은 치유의 기원보다 공동체가 음악과 춤으로 성인을 기억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순례 형태이지요.

 
성 빌리브로르도 바실리카와 옛 수도원. 현재 바실리카 양옆으로 이어지는 옛 수도원 건물은 1727~1736년 로렌 양식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수도원 건물은 1899년부터 학교로 사용되고 있고, 지하에는 수도원 박물관이 자리한다.


선교사가 세운 수도원, 학문·예술 중심지로

성 빌리브로르도는 658년경 영국 노섬브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리펀 수도원과 아일랜드 라트 멜시기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과 선교 교육을 받은 후 690년에 동료 11명과 함께 북해를 건너 프리슬란트 선교에 뛰어들었습니다. 695년 로마에서 주교품과 팔리움을 받고 위트레흐트 일대에서 사목하던 그는 698년경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수도원은 불과 25㎞ 떨어진 트리어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당시 트리어는 프랑크 왕국 서부의 핵심 교구였고, 에히터나흐 땅 역시 트리어 외렌 수녀원의 성 이르미나 수녀원장이 소유한 영지였습니다. 이르미나 원장이 트리어 주교의 승인을 얻어 땅을 기증하면서 수도원의 역사가 열렸습니다.

이후 에히터나흐는 피피누스 2세를 비롯한 카롤루스 가문의 보호와 면책특권을 획득하며 독자적인 제국 수도원으로 거듭났고, 11세기에 이르러서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번성한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수도원 필사실에서 제작된 「에히터나흐 황금 복음서」 등 화려한 채색 필사본들은 이곳을 유럽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각인시켰습니다.

 
성 빌리브로르도 바실리카 주 제대와 본랑. 11세기 로마네스크 성당의 기본 구조를 이어받았으며, 전후 재건돼 1953년 다시 축성됐다. 주 제대 정면에는 네 복음사가의 상징이 새겨져 있다. 뒤편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는 빌리브로르도 성인과 성 베드로·바오로 사도가 표현돼 있다. 1939년 준 대성전으로 승격됐다.


수도원 해산·전쟁 중 폭파 겪고 재건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 달리면 에히터나흐에 닿습니다. 시장 광장 한편에는 뾰족한 고딕 아치와 르네상스 양식의 창문이 어우러진 ‘덴첼트’ 건물이 눈에 띕니다. 중세 행정과 사법을 관할하던 청사로, 에히터나흐가 수도원의 그늘 아래 머물지 않고 자치 도시로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광장을 빠져나와 낮은 집 사이로 몇 분 더 걸으면 갑자기 시야가 열립니다. 한 변이 75m에 달하는 거대한 수도원 건물과 당당한 네 개의 탑을 거느린 성 빌리브로르도 바실리카가 위용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1000년을 이어온 번영도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하진 못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인 1797년 수도원은 강제 해산되어 경매에 부쳐졌고, 성당 건물은 도자기 공장으로 전락했습니다.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말 퇴각하던 독일군에 의해 폭파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지금 마주하는 당당한 모습은 전후 룩셈부르크 국민이 힘을 모아 복원해 낸 결실입니다.

 
지하 소성당의 성인 무덤(위)과 빌리브로르도 샘(아래). 안쪽에는 739년 선종한 빌리브로르도의 성해를 모신 흰 대리석 무덤이 있다. 그 옆에 자리한 성인의 이름을 딴 샘은 카롤루스 시대 세례대 흔적으로 보인다. 벽에는 라틴어로 “너희는 구원의 샘에서 기뻐하며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구절이 적혀 있다.


성인 무덤 위 세워진 바실리카

성당에 들어서면 로마네스크 특유의 묵직하고 장엄한 공간이 펼쳐집니다. 8세기 초 빌리브로르도가 세운 작은 일자형 공간에서 시작했지만, 순례자가 늘면서 약 800년에는 확장되었고, 1016년 화재 후에는 현재의 로마네스크 양식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당 전체가 11세기 그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13세기에는 본래의 평평한 천장을 고딕식 교차 리브 볼트로 바꾸고 창도 손봤습니다만, 전후 복원 과정에서 중앙 본랑 천장을 다시 초기 로마네스크 고유의 평평한 목조 천장으로 되돌렸습니다. 그래도 측랑에 옛 고딕 시대의 리브 볼트 일부를 볼 수 있습니다.

본랑을 따라 주 제대 쪽으로 걸어가면 높이를 달리한 두 제대가 보입니다. 윗 제대는 전후 1952년에 네 복음사가의 상징을 새겨 세운 새 주 제대이고, 그 아래 한 단 낮게 자리한 제대는 ‘콘페시오(confessio) 제대’입니다. 콘페시오는 초대 교회에서 순교자나 성인의 무덤 위에 제대를 두고 공경하던 전통에서 나온 말입니다. 콘페시오 제대 아래 지하 소성당에 성 빌리브로르도의 무덤이 있습니다.

 
에히터나흐 도약 행렬. 한때 교회가 이교적 요소를 우려해 금지하기도 했지만, 전통은 이어져 오늘날에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몸의 기도’로 받아들여진다.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음을 각오한 선교

중세 초 교회사를 읽다 보면 성 빌리브로르도처럼 ‘의지’나 ‘소망’을 뜻하는 ‘빌’(wil-)로 시작하는 인물을 자주 만납니다. 아이히슈테트 빌리발도 주교나 브레멘의 성 빌레하드 주교, 마인츠의 성 빌리기스 대주교가 대표적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들 모두 7~8세기 바다를 건너 유럽 대륙으로 온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지를 품은 이들이었죠.

당시 아일랜드, 앵글로색슨 수도자들에게는 ‘페레그리나티오(peregrinatio)’라는 깊은 영성이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순례’를 뜻하지만, 오늘날처럼 성지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고향과 익숙한 삶을 떠나 낯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실상 돌아올 것을 기약하지 않는 순례이자 영적 망명이었습니다.

성 빌리브로르도 역시 낯선 대륙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지로 고향을 떠난 순례자였습니다. 그의 여정은 이곳에서 멈췄습니다만, 한 사람의 순례에서 다른 이의 순례가 시작됐습니다. 성인의 무덤 앞에서 느끼는 또 하나의 신앙의 신비입니다.

 


<순례 팁>

※ 룩셈부르크 중앙역에서 트램으로 키르히베르크 방면으로 이동해 에히터나흐까지 201번 버스 이용(버스로 45분, 룩셈부르크 국내 버스, 트램 무료), 에히터나흐 버스정류장에서 바실리카까지 도보 10분.

※ 바실리카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9:00, 10:30, 18:30. 평일 9:00(월·화·목·금), 18:30(수). 지하 소성당의 성인 무덤과 빌리브로르도 샘, 수도원 박물관의 중세 필사본 전시를 함께 볼 것.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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