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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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의 피로 얼룩진 ‘병인박해’, 7년간 2000여 명 순교

[순교자 성월 특집 신앙의 영광] (중) 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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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부터 1873년까지 이어진 병인박해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겪은 가장 큰 규모의 박해이며 조선 왕조 치하의 마지막 공식 박해이다. 그림은 탁희성 화백의 ‘절두산 순교화’. 가톨릭평화신문 DB


서양세력의 침탈 계기로 촉발된 박해
병인양요·신미양요 거치며 극형 남발
20년 뒤 새 교우촌 이루며 신자 수 회복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19일 최형(베드로), 전장운(요한)에 이어, 23일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토마스)가 체포되면서 시작해 1873년 12월 24일 세도 정치를 펼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하면서 끝맺었다.

7년 남짓 지속된 병인박해는 한국 가톨릭교회사에서 최장 시간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대박해이다. 그 규모와 가혹함, 희생자 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기간에 베르뇌·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교황 파견 선교사 9명과 2000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한 것으로 집계됐다. 교회 일각에서는 병인박해 동안 1만여 명이 희생됐다고도 한다. 이들 순교자 가운데 24위가 성인품에, 19위가 복자품에 올랐다. 그리고 24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시복 추진 중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원인으로는 한국 가톨릭교회 창립과 함께 계속된 조선 왕조 지도층의 ‘위정척사’(衛正斥邪-바른 학문인 성리학을 지키고, 사악한 서양 종교와 학문, 문물을 배척한다) 의식과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들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정책에 기름을 끼얹은 1866년 러시아 남하 정책과 병인양요, 1868년 덕산 남연군 묘 도굴(굴총)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 통상과 수교를 요구하면서 무력을 동원한 외세의 조선 침탈이 한몫했다.


1866년 조선 교회 상황

1846년 병오박해 이후부터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 가톨릭교회는 국지적인 박해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전교 성과를 거둬 전국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그 결과 1866년 조선 가톨릭교회 신자 수는 2만 5000여 명에 달했다. 이 시기 조선 교회에는 주교 2명과 신부 10명 등 12명의 성직자가 사목했다.

교황 파견 선교사들과 조선인 교우들은 곧 조선 왕조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것으로 기대했다. 무엇보다 왕족과 양반 등 지도층의 세례가 이어졌고, 조선 사회에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라는 인식이 확산돼 전국적으로 교우 수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1866년 봄 박해

병인박해의 직접 원인은 조선 위정자들의 ‘외세 배척 사상’이다. 1860년 10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나라 수도 북경을 함락하자 조선 위정자들은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펴자 세도 정치를 펴던 흥선대원군은 승지 남종삼(요한)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1864년 8월 홍봉주(토마스) 등을 내세워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들과 조속한 회동이 성사되지 않자 차츰 마음을 바꿨다. 그 와중에 러시아의 두만강 월경 행위가 잠잠해지고, 조두순, 정원용 등 서양인과의 접촉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정치 공세도 거세졌다. 흥선대원군은 북경에서 저지른 서양인들의 중국인 살육 만행 소식을 듣고는 국면 전환을 위해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령을 내렸다.

1866년 봄 박해는 서울과 충청도 공주·제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선교사 대부분을 체포해 처형함으로써 조선 교회 지도층을 일시에 와해시켰다. 이 시기 베르뇌·다블뤼 주교와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푸르티에·프티니콜라·위앵·오매트르 신부, 정의배(마르코)·전장운·최형·황석두(루카)·장주기(요셉) 등이 순교했다.


병인양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박해를 피해 중국에 피신해 있던 조선 선교사 리델 신부를 앞세워 군함 3척을 이끌고 1866년 9월 26일 한강 양화진과 서강까지 들어와 시위를 벌이고 돌아갔다. 이어 로즈 제독은 10월 11일 군함 7척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탈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인들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한강 양화나루 잠두봉에 새 형장을 만들어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목이 잘려 순교해 이후 잠두봉을 ‘절두산’이라 불렀다.


남연군 묘 도굴 사건

1868년 5월 충청도 덕산에서 희대의 굴총 사건이 발생했다. ‘남연군 묘 도굴 사건’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굴총 사건으로 전국에 박해의 피바람이 휩쓸었다.

유다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유해를 탈취해 조선 정부와 통상 개방 협상을 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 일에 조선 선교사 페롱 신부와 조선 천주교인들이 가담한 것을 알게 된 흥선대원군은 격노해 대대적인 천주교인 색출을 명했다.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는 물론 서울 절두산, 경기도 수원·남한산성·죽산·남양, 충청도 공주·홍주·충주, 전라도 전주·여산·나주, 경상도 대구·울산·진주, 황해도 해주, 함경도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했다. 이때부터 많은 천주교인을 한꺼번에 처형하기 위해 백지사형, 생매장 등 극형이 남발됐다. “교우가 잡혀 배교하면 놓아주는 법인데, 덕산 산소 일 후에는 잡혀 배교해도 마구 죽였다”는 당시 교우들의 증언처럼 남연군 묘 도굴 사건 이후 박해가 잔혹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미양요

1868년 무진년 전국을 휩쓸었던 박해는 1870년 말까지 광풍처럼 몰아치다 잠잠해졌다. 하지만 불과 5개월 뒤 1871년 5월 26일 4척의 미국 함대가 강화도 앞바다에서 통상 요구를 하다 격퇴당한 ‘신미양요’ 사건이 발생하면서 꺼져가던 박해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흥선대원군은 미국 함대를 몰아낸 후 서울 종로를 비롯한 전국 8도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오면 싸우거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인들을 주저 없이 척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서울 포도청에서만 52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했다.


병인박해 이후 조선 교회

1866년 2월부터 시작한 병인박해는 1873년 12월 24일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하면서 끝맺었다. 병인박해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겪은 가장 큰 규모의 박해이며 조선 왕조 치하의 마지막 공식 박해였다.

병인박해로 조선 가톨릭교회는 황폐해졌다.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는 1876년 조선과 일본이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개항 시대가 열리고서야 겨우 그해 5월 입국해 조선 교회 재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지엽적인 박해는 간간이 있었지만,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은 처형되지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깊은 산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교우촌을 일구고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들녘과 읍내로 나와 새 교우촌을 이루고 살게 됐다.

조선 가톨릭교회는 이 교우촌을 토대로 20여 년이 흐른 뒤인 1894년이 되어서야 병인박해 이전의 2만여 명 신자 수를 회복할 수 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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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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