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지구 32바퀴 이동한 세계 여행가
1958년 여행 시작으로 지구 곳곳 방문해
갖은 위기 속 국적·인종 초월한 호의 경험
세계에 한국을, 한국에 세계를 전하다
사진 슬라이드 10만 장 등 기록물 남겨
서적 100만 권 이상 판매·국민훈장 추서
지난해 우리나라 해외 여행객은 3000만 명에 육박했다. 지금 우리는 휴대전화 하나로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고, 지구 곳곳을 누비는 여행 유튜버들도 셀 수 없다.
그보다 수십 년 앞서 배낭 하나 메고 세계로 나간 한국인이 있다. 여행을 ‘인간 수업’으로 여기고, 세계를 ‘인류 공동체’로 바라본 이, ‘한국 세계 여행의 선구자’ 김찬삼(토마스, 1926~2003) 선생이다. 그가 처음 세계 여행에 나선 때는 1958년. 한국전쟁의 폐허가 채 복구되지 않았고 해외 여행 자유화는 30여 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던 시절이다. 지리학자이자 교사였던 그는 40여 년 동안 총 3회 세계 일주와 20여 회 세계 여행을 통해 160여 개국을 방문했다. 순수 여행 기간만 14년, 이동 거리는 지구 32바퀴에 이른다. 낯선 땅에서 자신보다 더 큰 곤궁 속에 사는 사람을 만났고, 국적과 인종을 넘어 건네는 호의를 경험했다.
김 선생은 자신이 보고 듣고 기록한 세계를 책·사진·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와 나눴고, 이는 많은 이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 됐다. 올해는 김찬삼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여행이 일상이 된 시대, 한국인의 세계 여행에 길을 낸 ‘세계의 나그네’가 남긴 발자국을 다시 따라가 본다.
1959년 알래스카 포인트 배로에서 아이들과 찍은 사진.
유서 써놓고 떠난 세계 여행
김 선생이 세계 여행을 꿈꾸게 된 데에는 14살 때 세상을 떠난 형의 영향이 컸다. 자전거 여행 중 사고로 떠난 형의 유품에서 “언젠가 남미의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아프리카를 넘으리라”는 글을 발견했다. 그는 형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동방견문록」도 소년의 마음에 세계를 심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왔다면 나는 동에서 서로 가겠다”고 꿈꿨다.
그러나 꿈만으로 세계에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는 우선 세계 여행을 위한 관문으로 미국 유학을 택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교(SFSU)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수학할 때 정원을 돌보고 항공사 기내 청소 등을 하며 경비를 모았다. 그렇게 1958년 제1차 세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페루 안데스 고원을 밟으며 형의 소원을 이뤘다.
그의 여행 원칙은 분명했다. 떠나기 전 현지 지리와 국제 정세를 공부하고 최신 지도와 카메라를 준비했다. 교통편은 가능한 한 가장 싼 것을 택했고 화려한 복장을 피했다. 호텔보다 여행자 숙소를 찾고 식사는 전통시장에서 해결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기 전에는 그날의 여행 상황과 지출을 기록하고 이동 경로를 지도에 표시했다.
김찬삼 선생의 일기. 매일의 여행 기록을 빠짐없이 남겼다.
또 하나의 원칙은 ‘위급할수록 미소를 잃지 않는다’였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통하지 않으면 웃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준 최상의 의사소통 수단은 미소”라고 했다.
하지만 여행은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비자 문제로 국경에서 발이 묶이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나마 필름은 구두 속에 숨겨놓아 건질 수 있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자고, 숲에서 길을 잃어 굶주리기도 했다. 아마존에서는 현지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쥐고기까지 먹었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유서까지 써놓았다. 그렇게 목숨 걸고 세계를 걸은 끝에 그는 ‘사람’을 발견했다.
제1차 세계 여행을 마친 그는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분명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길 위에서 몸으로 얻은 결론을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넓고 사람들의 마음씨는 아름답다.”
그는 “인간 수업에 있어서 여행처럼 좋은 것이 없다”고 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는 ‘위대한 성경’이라고 했다.
김찬삼 선생의 딸 김서라 이사장이 부친의 수많은 상패가 전시된 거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버지 김찬삼은
김 선생의 1남 6녀 중 셋째 딸 김찬삼세계여행문화협회 김서라(요안나, 73) 이사장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아버지의 긴 ‘부재’가 자리한다. 한 번 여행을 떠나면 몇 년씩 집을 비웠다. 그 자리는 어머니와 조부모가 채웠다.
그런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김 선생은 귀국한 뒤 방학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국내 곳곳을 여행했다. 가족 여행에서도 그는 ‘지리 선생님’이었다. 석탑 하나를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한참 설명한 뒤에는 자녀들에게 질문했다.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김 이사장도 훗날 교사가 돼 39년 동안 교단에 섰다.
세월이 흘러 김 선생의 강연과 책을 접한 뒤 외교관 꿈을 키우고 세계로 나갔다는 이들이 김 이사장을 찾아왔다. 자신을 ‘자전거 김찬삼’·‘자동차 김찬삼’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김찬삼 선생이 세계여행 중 찍은 슬라이드 필름.
김 이사장은 본지와의 만남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업적이 크게 느껴진다”며 “아버지를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이들의 증언을 기록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김찬삼이라는 이름이 낯설어진 30~40년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겨진 기록도 방대하다. 김 선생이 세계 곳곳에서 촬영한 슬라이드만 10만 장에 이른다. 개인 여행 기록을 넘어 세계의 모습과 한국인 시선이 담긴 시대 기록이다. 지도·일기·원고·사진 등 자료도 방대하다. 여행 중 집으로 보낸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도 1000권이 넘는다.
김 이사장은 “무엇보다 이 자료들을 디지털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김찬삼 여행박물관’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63년 가봉 랑바레네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
수많은 독자·청중에 전한 여행 이야기
김 선생은 세계를 ‘인류 공동체’로 바라봤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고, 동시에 자신이 직접 본 세계를 한국인들에게 보여줬다. 세계로 멀리 나갈수록 조국에 대한 애정은 더 커졌다. 그때마다 한국의 아름다운 풍속을 담은 사진과 교육용 슬라이드를 챙겼다. 해외 언론과 만나면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변화상을 설명했고, 애국가와 아리랑을 소개했다.
1963년 제2차 세계 여행 중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그가 가장 동경하던 노벨상 수상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보름 동안 함께 지냈다. 김 선생의 집필실 책상 벽면에는 지금도 슈바이처 박사와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그가 세계 곳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는 책과 강연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청중에게 전해졌다. 전 10권으로 출간된 「김찬삼의 세계 여행」은 100만 권 이상 판매됐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가정 방문 판매의 대표 서적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그를 진정한 외교관이라 평가하는 이유다. 선종 5년 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 받았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찬삼 선생의 기획전이 영종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다.
여행가에서 ‘김찬삼 토마스’로
여행과 집필, 강연으로 평생 분주하게 살아온 그는 말년에 아내 고 정안순(루실라) 여사와 함께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했다.
김 이사장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장면은 손을 잡고 새벽 미사에 가던 부모의 모습이다. 거동이 불편해진 뒤에는 김 이사장이 부모를 차로 성당에 모셨다. 미사가 끝나면 어머니는 성체조배실에 남았다. 언제나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한 어머니다. 아버지는 비뚤어진 성당 의자를 정리하고 쓰레기도 주웠다. 평생 지구 곳곳의 길을 걸었던 여행가는 병상에 눕기 전까지 그렇게 성당 의자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김 선생을 병간호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 선생도 6개월 뒤인 2003년 7월 2일 눈을 감았다. 다음 날인 7월 3일은 그의 세례명 성 토마스 축일이었다. 김 이사장은 “말년에 보속과 같은 아버지의 신앙생활이 하늘에 닿은 것 같이 느껴졌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김찬삼 선생이 꿈꾸던 것보다 훨씬 쉽게 세계로 나간다. 여행가들의 넘쳐나는 영상을 보며 낯선 도시의 골목과 음식까지 손바닥 안에서 만난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을 ‘인간 수업’이라 부르며 낯선 이들과 직접 눈을 맞추고 세계를 바라본 그의 삶은 오히려 지금 여행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제시해준다. 탄생 100년, 잊혀가던 ‘세계의 나그네’가 우리 앞에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