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회의 자립을 위한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余恒德·파치피코)의 노력을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여 신부의 야심찬 계획은 서양인 신부들과의 갈등으로 좌절됐는데, 이는 서양우월주의적 시각 속에 동아시아인 사제의 역할이 축소됐던 1830년대 당시 교회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회장 신의식 멜키올)은 9월 17일 서강대학교 김대건관 국제회의실에서 제1회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중국근현대사학회와 공동 주관한 학술발표회에서 수원교회사연구소 이석원(프란치스코) 연구실장은 ‘1830년대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과의 갈등: 조선대목구의 관할 주체와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이같이 전했다.
여항덕(조선식 이름 유방제) 신부는 주문모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신부다. 1834년 조선에 도착한 여 신부는 3년간 사목활동을 했다. 여 신부는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도와주는 보조적 역할로 조선에 파견됐으나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에 필요한 최선의 선교 방책을 찾고자 했다. 이 연구실장은 “여 신부는 조선 신자들과 논의한 끝에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대리 주교에게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을 제시했으며 또한 장기적인 안목 아래 조선교회의 관할권 문제(조선인 자치)까지 언급했다”며 “한편 서양인의 존재가 조선교회에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밀입국을 만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여 신부의 행위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월권, 불복종으로 인식됐고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그를 ‘음흉하고 무모한 중국인 사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범죄자’로 부르기도 했다. 결국 여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순명해 그의 조선 입국을 준비했다. 이 연구실장은 “여 신부의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은 궁극적으로 조선인 사제와 조선인 신자로 구성된 자치 교회를 지향한 매우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여 신부는 중국으로 귀환할 때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선발한 세 명의 조선인 신학생과 동행, 조선인 사제가 탄생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 따르면 그 전에는 북경이나 마카오에 조선 청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조선 신자들이 여 신부가 입국한 이후 그 필요성과 가능성을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연구실장은 “조선인 사제가 나와야만 조선교회가 끊어지지 않고 천주교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는 여 신부의 주장이 조선인 사제 양성에 소극적이던 조선 신자들을 설득시킨 결과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