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중턱에 자리한 한티(현 한티순교성지)는 대구대교구의 탄생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성지로, 말 그대로 ‘대구대교구의 요람’으로 불릴만 하다. 한티 교우촌에서는 하느님의 종 서태순 베드로(1823~1867)와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1838?~1868) 등이 살았다. 이곳 신앙 선조의 후손인 서상돈(아우구스티노·1850~1913), 김찬수(베르나르도·1882~1951), 최정복(요셉·1896~1955) 등은 대구대교구가 설정되고 기초를 놓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한티는 무명 순교자들이 다수이고 교우촌에 대한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 진면목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4월 27일 오후 3시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교정 대강당에서 열린 ‘한티 교우촌과 순교자’ 심포지엄은 대구대교구 신앙 전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티 교우촌에 대한 체계적 정리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번 심포지엄은 대구가톨릭대학교 영남교회사연구소(소장 김정희 바오로 신부)와 한국가톨릭신학학회(학회장 곽종식 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펴낸 대구대교구 순교사 자료집 제3편 「한티순교성지 자료집」(238쪽/1만5000원)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제1주제 ‘한티 교우촌의 기원’에 대해 발표한 김정희 신부는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료들과 기존 연구들을 바탕으로 한티 교우촌의 기원을 추적하고 정리했다. 김 신부는 “한티 교우촌에 관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료에는 1862년 당시 40명이나 성사를 받을 만큼 어느 정도 규모의 교우촌이 형성됐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며 “그 밖에 정확히 언제 (교우촌이) 시작됐는지는 확실하게 단정 지을 단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신부는 “한티 교우촌이 박해시대부터 존재했고, 대구대교구 시작점에서 가장 중요한 요람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제2주제 ‘무진박해와 한티 순교자’ 발표를 맡은 권동근 신부(요한 세례자·대구 월성본당 제1보좌)는 구전 증언뿐 아니라 순교자 묘 발굴 기록과 무진박해(1868년)에 대한 다양한 문헌과 기록 등 객관적 사료에 근거해 당시 정황을 추측하고, 한티 순교자들의 순교 시기를 가늠하고자 했다. 권 신부는 “한티 순교자들이 병인박해 중에서도 1868년 무진년 봄, 4~6월 사이에 순교했다고 추정한다”고 말했다.
각 주제에 대한 논평은 부산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김덕헌(베드로) 신부, 대구가톨릭대 이경규(안드레아) 명예교수가 맡았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는 “이곳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정리 작업을 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뒀으면 한다”며 “이 자리를 통해 더 많은 분들이 한티 순교자들의 현양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