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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년 만에 다시 핀 박해 속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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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속에 핀 조선인 신자와 프랑스인 선교사의 우정, 그 영성은 후손들에게 전해져 다시 꽃 피웠습니다.”


병인박해(1866~1871) 당시 신분·국적을 초월한 영성으로 우정을 나눴지만 안타까운 이별을 해야했던 안동교구 순교자 복자 박상근(마티아, 1837~1867)과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깔래 신부(Nicolas adolphe Calais, 1833~1884)의 후손들이 158년 만에 만났다. 안동교구 정도영(베드로) 신부의 노력으로 깔래 신부의 고향 프랑스 크리옹(Crion)에서 찾아낸 깔래 신부 후손들이 한국 땅을 찾아 복자 박상근의 후손들과 감격 속에 만난 것이다.


5월 29일 오전 10시 경북 문경시 안동교구 마원성지(담당 정도영 베드로 신부)에서 오정형 신부(요한 세례자·안동교구 문경 점촌동본당 주임)와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복자 박상근 마티아 순교자 기념미사’가 봉헌됐다. 이날 미사에는 복자 박상근과 깔래 신부의 후손들이 참례했다.


미사에 참례한 깔래 신부의 후손들은 깔래 신부 형(도미니크)의 증손자 부부·증손녀 부부 및 외증손 아내, 동생(샤를 프랑수아)의 증손녀 모녀 등 총 7명이며, 복자 박상근의 후손들은 고손자·고손녀 등 총 3명이다.


기념행사에서 깔래 신부 후손들은 깔래 신부가 고향으로 보냈던 자필 서한 2통과 깔래 신부의 로만 칼라 옷자락 등 유품을 교구 측에 전달했다. 서한과 유품은 안동교구 역사관에 있는 깔래 신부 기념 전시관에 전시된다. 복자 박상근 후손들도 깔래 신부 후손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며 정을 나눴다.


복자 박상근과 깔래 신부의 인연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문경 지역에서 선교했던 깔래 신부와 아전(하급 관리) 출신의 천주교 신자였던 박상근은 서슬 퍼런 박해를 피하기 위해 함께 산 중턱을 넘어 인근 한실 교우촌으로 향했다. 탈진 상태로 산을 넘던 이들은 결국 눈물 속에 헤어져야 했다. 신자가 위험에 빠질 것을 염려한 깔래 신부가 박상근 복자에게 인근 마을로 갈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후 깔래 신부는 중국으로 잠시 피신한 뒤 여러 차례 조선 재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884년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다 선종했다. 박상근 복자는 관군에 의해 체포돼 1867년 순교했다.



깔래 신부 후손 도미니크 마르틴 미셀씨는 “한국에 오니 신부님이 왜 그토록 선교에 열정적이셨는지 잘 알 수 있었다”며 “또한 복자 박상근의 후손을 만난 벅찬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라고 소감을 밝혔다.


복자 박상근 후손 박태진(바오로·수원교구 여주본당)씨도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항상 프랑스에 있을 신부님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었다”며 “이제라도 신부님 후손들을 뵙게 돼 너무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화답했다.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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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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