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4세기 카파도키아 지방의 저명한 삼총사, 곧 대(大)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즈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각자 삶의 자리가 달랐지만 신학과 교회 발전을 위해 애쓴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 2002년 한국교부학연구회가 탄생하던 날부터 함께해 온 하성수 박사와 노성기 신부, 최원오 박사도 사제와 평신도의 길에서 한국 교부학의 토대를 놓기 위해 힘을 모아왔다.
22년 교부학 동지인 이들이 공동 번역한 「교부학 사전」(Lexikon der antiken christlichen Literatur)은 그 결정체다. “이번 상은 「교부학 사전」 하나만이 아니라 저희가 그동안 교부학의 토대를 위해 함께 작업한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과 「교부 문헌 용례집」, 「교부들의 성경 주해」 등에 대한 평가로 생각한다”는 하성수 박사의 수상 소회가 그 의미를 설명해 준다.
「교부학 사전」은 현대 교부학계의 대가(大家) 지그마르 되프와 빌헬름 게어링스가 펴낸 것으로, 로마 아우구스티누스 대학이 발행한 「교부학과 고대 그리스도교 새 사전」과 더불어 오늘날 교부학 사전의 양대 기둥으로 꼽힌다. 독일의 교부학 입문서 전통과 계보를 잇는 이 사전은 교부들(敎父, Patres)과 교부학적 주제, 교부 문헌과 연구 번역서 등에 관한 문헌학적 정보를 백과사전처럼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말 「교부학 사전」 발간은 한국교회 교부학자들의 과업이었다. 인물을 비롯한 중요 교부학적 주제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사전은 교부학 연구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전 작업이 엄청난 인력과 공력을 필요로 하지만 「교부학 사전」 번역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뒤얽혀 있다. 우선 인명과 지명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국교부학연구회가 창립 때부터 용어 통일을 선결 과제로 삼고 교부학 인명 지명 작품명의 통일안을 추진한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기초를 딛고 진행된 사전 번역에는 5년 여의 직접적인 초역 윤독을 통한 준비와 2년 간의 신학 검토와 최종 교정이 필요했다. 2단 1284쪽 분량에 이르는 번역본은 독일어 원본이나 영어 번역본보다 더 정밀하게 교부 문헌의 원제목을 제시하고 우리말로 다듬어졌다. 역자들은 특별히 교부학 용어뿐 아니라 연관 학문 분야에서 중점적으로 사용해 온 용어들을 일관성 있게 번역하고 통일하는 데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한국 독자들 눈높이에 맞춰서 모든 약어를 전혀 쓰지 않고 인명과 지명과 작품명을 완전하게 풀어서 썼을 뿐만 아니라, 출간된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과 「교부 문헌 용례집」에서 수정 보완해야 할 내용까지 새겨 넣는 등 완성도를 높였다. 그 과정에서 원본의 오류들도 많이 바로잡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서보다 더 실용적이고 정확하고 풍부한 사전이 됐다. “한국교회와 교부학계가 교부 사상 연구의 확실한 기준점을 확보하게 됐다”는 평이 무색하지 않다.
방대한 번역 원고를 세 사람이 일 년에 몇 번씩 서로 돌려 읽는 작업은 그야말로 몸살을 앓을 만큼 힘들었다. 원고를 한번 돌려 읽을 때마다 계절이 바뀌고 여러 해가 흘렀다. 출판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수 학문 분야 사전을 펴내는 출판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야말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고 출판을 감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내 「신학대전」 완간을 위해 국가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던 한국성토마스연구소(소장 이재룡 시몬 신부)가 천주교조선교구설정 200주년 기념 사업에 「교부학 사전」의 자리를 만들면서 발행이 이뤄졌다.
노성기 신부와 최원오 박사는 사전 번역의 공을 하성수 박사에게 돌렸다. 하 박사는 번역의 기초 자료를 준비하고 교정 원고를 종합하는 고달픈 일을 맡았다. 사전의 든든한 밑바탕이 된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과 「교부 문헌 용례집」을 한국교부학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준비하고 마무리한 주역이기도 하다. 그 토대 위에서 「교부학 사전」은 화룡점정이 됐다.
하 박사는 “최근까지의 교부학 연구의 맥을 한 번 매듭지었다는 데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밝히고 “이 사전이 앞으로 교부학 연구자들에게 밑거름이 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지침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노성기 신부는 “넓고 깊은 교부들 가르침과 신앙과 영성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기 위해 힘을 모아 온 세 사람이 남은 여정도 함께 걸어가겠다”고 소감을 남겼다. “불쌍히 여기시어 뽑아주셨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사목 표어가 떠오른다”는 최원오 박사는 “부족한 저와 함께 한결같이 동행해 주신 모든 분과 학문적 동지들에게 진심 감사드린다”고 수상에 대한 변을 밝혔다.
◆ 제28회 한국가톨릭학술상 심사평
제28회 한국가톨릭학술상 최종 수상작은 교계 주요 출판사들을 통해 간추린 지난 3년간의 출판물들 가운데 엄정한 심사를 통해 선정됐다. 저서 부문 후보작 17권 가운데 본상과 연구상 후보작을 공동으로 세 권 선정하고, 번역서 부문 후보작 22권 중 3권의 후보작을 정해 심사위원들을 지목하고 위촉했다. 심사는 전문 심사위원들의 개별심사 및 공동 심사 과정을 거쳤다.
본상과 연구상 부문 심사는 이재룡(시몬) 신부, 배영호(베드로) 신부, 윤주현(베네딕토) 신부, 조광(이냐시오) 교수 등 한국가톨릭학술상 운영위원 4명과 정진만(안젤로) 신부, 안소근(실비아) 수녀가 맡았다. 번역상 부문 심사는 운영위원 외에 허규(베네딕토) 신부와 조세근(라파엘) 신부가 맡았으며, 공로상 부문은 운영위원들이 심사했다.
본상 「교부학 사전」(한국성토마스연구소)은 1990년대말까지 연구된 세계 교부학계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이미 고전으로 간주되며 그 포괄성과 편리성 때문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사전으로서, 이번 번역 발간은 교부학 분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과 개신교와 정교회를 비롯한 범 그리스도교계를 위한 커다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1300여 항목을 통해 교부들과 그 논적들에 대한 정보와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속에서 주요 개념들을 풀이하고 있다.
연구상 수상작인 「토빗기」(바오로딸)는 40쪽에 이르는 충분한 ‘입문’으로 독자가 궁금해할 수 있는 사안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고 본문의 상세한 주해도 물 흐르듯 편안하다. ‘토빗기’는 제2경전에 해당하는 신구약을 연결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개신교에서는 물론 가톨릭에서도 전문한 연구 분야를 내놓아 그 가치를 알렸다.
「마르코가 전하는 기쁜 소식」(성서와함께)으로 번역상에 선정된 염철호 신부는 평생 마르코복음서를 전공하고 집중적으로 심화시키며 살고 가르쳐온 학자다.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알찬 번역이 가독성을 끌어올린다.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된 정달용(요셉) 신부는 1975년부터 광주가톨릭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 지금까지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 등 교육에 기여한 공로가 높게 평가됐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으로 불리는 정 신부는 요즘도 매일 신학대학 도서관에 출근하며 오래도록 도서관장으로 지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