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00여 명 홍주 순교자를 기념해 성모성심께 봉헌된 홍성성당은 순교자를 형상화한 작품들로 꾸며져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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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옛 `홍주` 땅인 이곳에서 1792년 12월 17일 충청도 첫 순교자가 탄생했다. 바로 홍주 사람 원시장(베드로)과 사촌 원시보(야고보)다. 이들의 순교에 이어 1797년 정사박해 때 홍주 면천면 출신 방 프란치스코와 2명의 동료 순교자, 1799년 박취득(라우렌시오), 1801년 백정 출신 황일광(시몬) 등이 순교했다. 또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들 최양업 신부가 홍주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출신이다. 이여삼(바오로)과 김윤우(시몬), 유 바오로, 최대종(요셉) 등이 기해박해 전후로 홍주에서 순교했다. 또 「치명일기」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등에는 홍주에서 병인박해 때 150여 명이 순교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홍성은 무명 순교자까지 700여 순교자의 피로 성장한 거룩한 복음의 땅이다.
홍성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0년 2월 17일이다. 초대 주임은 1948년 대전교구가 설정된 이래 첫 사제품을 받은 강만수(요한) 신부였다. 강 신부는 새 본당의 기틀을 마련할 틈도 없이 6ㆍ25전쟁을 맞았다. 인민군이 홍성에 주둔하기 이틀 전인 1950년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강 신부는 본당 남정우 회장에게 본당을 맡긴 후 전시 상황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대전교구청으로 떠났다.
교구 사제단과 대책을 마련한 후 돌아오던 강 신부는 이미 인민군이 홍성을 점령하고 있어 공주 교우 집에 숨어지내며 은밀히 신자들을 돌봤다. 그는 전쟁 중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어서 신자들의 혼인장애를 풀어주고 성체를 모시게 했다. 또 인민군의 눈을 피해 가며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이때 이항진(토마스)씨가 강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대전공업학교 수학 교사로 대전에 근무하고 있던 그는 강 신부를 돕기 위해 동행해 공주로 왔다.
1950년 8월 중순 강 신부와 이씨는 함께 체포됐다. 공주성당 옛 사제관 지하에 갇혀있다가 1주일 후 밤에 대전 목동수도원으로 이송됐다. 공주에서 잡힌 여러 사람을 태운 낡은 목탄 트럭이 대전으로 가는 마티 고개를 힘겹게 넘어가자 하나 둘씩 뛰어내려 도망쳤다. 강 신부도 피신할 수 있었으나 "다 도망가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며 그대로 남았다. 이항진씨도 강 신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둘은 1950년 9월 23~26일 사이 목동수도원에 갇힌 모든 인사가 인민군에게
학살될 때 함께 처형돼 순교했다.
홍주성당은 1969년에 지어져 40년 넘게 사용한 고암리 옛 성당을 허물고 2011년 6월 18일에 새롭게 지어 봉헌했다. 700여 명 홍주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해 홍주순교자기념성당으로 명명돼 성모성심께 봉헌된 홍성성당은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붉은 벽돌 콘크리트조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종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상이 부조로 장식돼 있고, 성당 마당에 자리 잡은 나무 종탑도 이국적이다. 성당 내부 장식은 순교자들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꾸며졌다. 제대와 감실, 독서대와 성수대는 순교자의 목칼을 형상화했고 모든 성물은 칠보 그림과 옻칠로 마감했다.
홍성성당과 더불어 홍주읍성 조양문, 현 홍주군청 내 홍주 아문과 동헌 안회당, 여하정, 오관리 느티나무, 북문교 옆 참수터, 생매장터를 꼭 순례하기를 추천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