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여에 세워진 첫 성당인 금사리성당은 한옥과 서양 고딕양식을 절충한 것으로 충남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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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년 동안 `사비`라는 이름의 옛 도읍이었던 부여는 백제 왕조만의 고향은 아니다. 이곳을 삶의 자리로 한 옛사람들은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금사리성당이다.
대전교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3호로 등재된 금사리성당은 충남 부여 땅에 지어진 첫 번째 가톨릭 교회 건축물이다.
금사리본당은 1901년 4월 공주본당(현 공주중동본당)에서 분가, 신설됐다. 초대 주임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 334 현지 땅을 사들여 곧바로 공사에 들어가 1906년 4월에 금사리성당을 봉헌했다. 본당 신자들은 성당이 완공될 때까지 5년간 중국인 기술자와 함께 직접 황토로 벽돌을 구워내고, 인근 산에서 돌과 나무를 운반해 와 성당을 지었다.
한옥과 서양 고딕 양식을 절충한 금사리성당은 돌기단 위에 회색과 붉은 벽돌을 섞어 쌓고 기와지붕을 올렸다. 전면 7.8m, 측면 18.5m 규모의 아담한 단층 건물인 금사리성당 내부 공간은 제단과 신자석으로 구성돼 있다. 또 신자석을 가운데 일렬의 기둥으로 남녀 자리를 구분해 놓은 것이 이 성당의 특징이다.
금사리성당은 부여 무량사 가는 길 40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더 넓은 구룡평야를 휘감고 도는 구룡천을 끼고 형성된 금사리 마을 한가운데 야트막하게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탁 트인 들녘과 옹기종기 모인 농가들 사이에 우뚝 솟은 성당 종탑이 한 폭 그림이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게 몰수된 금사리성당은 공산당 집회 장소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었다. 또 당시 본당 주임이던 몰리바르 신부는 교우들에게는 "위험한 상황이므로 당분간 성당에 자주 나오지 말라"하고 혼자 미사를 봉헌하다 1950년 8월 20일 인민군에게 체포돼 부여로 압송됐다. 인민군들은 폭격을 피하려고 미군 비행기가 날아오면 수단을 입은 몰리바르 신부를 지붕 위로 올려보내 손을 흔들도록 했다. 몰리바르 신부는 1950년 9월 16일 대전 목동 수도원으로 이송됐고, 거기서 9월 23~26일 사이에 다른 신부들과 함께 머리에 총을 맞고 순교했다.
이후 본당 신자들은 몰리바르 신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그의 유서를 발견했다. 유서에는 자신에게 남겨진 유산을 규암이나 부여에 성당을 세우는 데 사용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금사리성당이 지역의 사회적ㆍ 경제적 규모와 상관없이 신자들이 많이 사는 외진 곳에 있어 미래를 위해 지역의 중심이 될 만한 곳에 새 성당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몰리바르 신부의 유언에 따라 1955년 규암에 본당이 설립됐고 그곳에 세워진 병원도 그의 세례명을 따라 `성 요셉 의원`으로 이름 지어졌다. 금사리본당으로 부임하기 전 프랑스 고향의 포도밭을 팔아 경기도 평택 서정동성당을 지었던 몰리바르 신부는 순교한 후에도 성당을 또 하나 지은 것이다. 몰리바르 신부의 묘는 그가 초대 주임으로 사목했던 수원교구 평택성당에 있다.
금사리성당은 2006년 건립 100주년을 맞아 보수ㆍ복원 작업을 거쳤다. 벽 전체를 헐어 다시 쌓고 동판 지붕에 종탑을 복원했다. 소박한 주변 조경과 함께 새로 단장한 금사리성당 터에는 지방 문화재인 옛 금사리성당과 사제관, 사랑채, 그리고 1968년에 신축한 새 성당이 있다. 또 성당 성모상 앞에는 1913년 9월 뮈텔 주교가 축복한 돌제대가 놓여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