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형이 제대로 유지된 예산성당은 한국 근대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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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의좋은 형제`의 고장 충남 예산.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 마을 예산리 644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을 축소해 놓은듯한 고풍스러운 성당이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바로 대전교구 예산성당이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은 이후 충남 예산 지역에 가톨릭 신자들이 늘자 예산공소 윤창규(이냐시오) 회장이 적극 나서 본당 설립 운동을 벌였다. 윤 회장은 사비를 털어 6칸짜리 한옥을 짓고 본당 신부 영입을 준비했다. 이 한옥은 본당 설립 후 새 성당이 봉헌될 때까지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됐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예산본당은 1927년 9월 합덕본당에서 분가해 신설 본당으로 설립, 초대 주임으로 구천우 신부가 부임했다.
예산본당이 설립되자 본당 회장직을 맡게 된 윤창규 회장은 1929년 성당 건축을 위해 막대한 재산을 헌납했다. 제2대 주임 황정수(요셉) 신부는 이 헌금을 목돈으로 성당 터를 매입, 1933년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해 1934년 현재의 성당을 봉헌했다.
한국인 황정수 신부에 의해 지어진 예산성당은 붉은색과 회색 벽돌을 섞어 쌓아올린 벽돌조 건물로 단아하고 소박하면서도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전형적인 삼랑식 성당 건축물인 예산성당은 전체 구성은 단순하나 처마돌림 띠, 창 둘레 아치 장식 등의 비례가 뛰어나 2004년 3월 20일에 충남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됐다.
원형이 잘 보존된 예산성당은 일제 강점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건축문화를 혼재해 수용하지 않고 서양 성당 건축 양식을 그대로 토착화해 한국의 근대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950년 4월 15일 홍성본당을 분가한 예산본당은 6ㆍ25전쟁의 수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전쟁이 터지자 온양본당 주임 를뢰 신부가 예산성당을 찾아와 본당 주임 리샤르 신부와 전쟁 양상을 파악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본당에 머물러야 한다"고 서로 뜻을 같이했다.
신자들은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신부는 "교우들이 가지 않는데 신부가 갈 수 없다"며 피난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8일 예상보다 빨리 인민군이 충남 아산 지역까지 점령하자 를뢰 신부는 온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7월 12일 예산을 점령한 인민군은 예산성당을 내무소로 바꾸고 두 신부를 감금했다. 8월 28일까지 성당에 갇혀 있던 두 신부는 대전 목동수도원으로 이감된 후 9월 23~26일 사이 총살됐다. 를뢰 신부는 6ㆍ25 발발 이전 이미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 전쟁이 나면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던 그는 프랑스 동창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마지막으로 나는 간절히 기도해 달라고 오로지 네게 부탁한다. 내가 점점 더 겸손해지고 점점 더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나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위한 고난을 견디어내도록 나를 불러주시고, 내가 좀 더 헌신적이고 가능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사실 가까이서 보면 순교는 자신을 믿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믿는 것을 요구한다."
프랑스로 유학해 한국천주교회 첫 박사 신부로 인보성체수도회를 설립한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의 형 윤갑수 회장도 1950년 9월 27일 예산에서 순교했다. 윤 회장은 기도서와 묵주를 갖고 집을 나갔다가 마을 자위대에게 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그는 머리와 가슴, 다리에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