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01년 신유박해부터 6ㆍ25전쟁까지 32위 순교자를 배출한 공세리성당은 충청도 첫 성당으로 한국관광공사로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된 바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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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행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충남 아산 공세리성당. 한국관광공사가 2005년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하고 드라마ㆍ영화 촬영지로도 사랑받고 있는 이곳은 32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이다.
1890년 산골 교우촌에 설립된 간양골본당으로 출발한 공세리본당은 서양 선교사가 수단을 입고 활동한 충청도 첫 지역이며, 충청도에서 감실이 처음 설치된 곳이다. 교구장 방침에 따라 간양골에서 공세리로 옮긴 에밀 드비즈 신부는 공주ㆍ부여ㆍ천안을 관할하는 새로운 교우촌을 형성, 1922년 10월 8일 현재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공세리성당 터는 조선 시대 충청도 서남부 지역 39개 마을에서 거둔 세곡을 저장 보관하던 공세창 자리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공세리라 불렀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3도 해운판관비`와 `공세곶 터` 성벽이 남아 있다.
공세리성당은 3만 3000㎡(1만 평) 대지 위에 세워진 우리나라 9번째 성당이자 충청도 최초 성당이다.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한 이 성당은 삼랑식 라틴십자가 모양으로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이 어울려 수령 600년이 넘는 주변 고목과 빼어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성당 제단 벽면에는 `슈고하는 쟈와 무거운 짐진쟈는 내게로 오라나! 너희를 도으리라`(마태 11,28)는 복음 말씀이 새겨져 있다. 벽면 상단에는 본당 수호성인인 성 베네딕토 상이 있고 그 아래에 옛 나무 제대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창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한 색유리화로 장식돼 있다.
6ㆍ25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북한 인민군은 경기도 평택까지 진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세리본당 김사천 회장과 몇몇 신자들이 뷜토 신부에게 "피난 가셔야죠" 하자 그는 "네 가야죠. 하지만 신자들이 안 가면 저도 못 가요. 목자가 양을 두고 갈 수 없지요"라며 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1950년 7월 8일 아침 8시 30분께 인민군이 공세리 인근 달보기 도로 옆 과수원에 곡사포를 설치하고 공포탄을 쏜 후 공세리성당으로 난입했다. 그들은 뷜토 신부를 체포해 사제관 식당에 감금하고, 사제관은 정치보위부 사무실로, 성당은 기마부대 본부로 징발했다.
그즈음 공세리 부근에 미 공군기가 추락, 조종사 2명이 체포됐다. 뷜토 신부는 동료 선교사가 사제관에 두고 간 짐에서 라디오가 나오자 간첩으로 오인돼 7월 20일 미군 포로와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 뷜토 신부의 서울 수감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50년 8월 1~7일 사이에 제작된 북한 공산당 선전 영화에 베레모를 쓰고 수단을 입은 채 한국 수녀들과 함께 미군의 폭격에 반대하는 시위에 강제 동원된 장면이 등장한다.
이후 뷜토 신부는 다른 성직ㆍ수도자와 함께 개성으로 압송된 후 수감됐다. 감옥에서 소지품 검사를 할 때 모든 물품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으나 뷜토 신부는 자신의 성무일도서를 빼앗기지 않으려 움켜쥐었다. 간수의 무수한 발길질에도 그는 끝까지 빼앗기지 않았다. 그의 성무일도서는 감옥에 남은 유일한 기도서로 포로 기간 내내 모든 성직자가 돌아가며 사용했다.
뷜토 신부와 동료 성직자ㆍ수도자들은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 만포,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뷜토 신부는 하나둘씩 죽어가는 동료들을 돌보다 1951년 1월 6일 순교했다. 그와 함께했던 동료들은 얼어붙은 땅을 팔 수가 없어 뷜토 신부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한 채 눈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공세리성당은 성체조배실, 십자가의 길, 성당, 성모상, 드비즈 광장, 박물관, 순례길, 순교자 묘지, 성가정상, 예수성심상, 피정의 집 등으로 단장돼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