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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승수 신부 |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입니다. ‘신’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절대적 가치들이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말이지요. 이 말이, 사실은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끊임없이 외치고 있으며, 매해 사순 시기가 되면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신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인간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 죽음이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묵상하며, 그 의미를 헛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겁니다.
오늘 루카복음의 수난기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께서 잔혹한 고문을 받으시는 모습이나 치욕을 당하시는 순간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간략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슬프고 불행한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뤄지는 과정이자 필수조건임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의도를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에게나 행해지던 십자가형으로. 유다인들은 이 사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고대하던 메시아를 자기 손으로 죽인 그들의 모습을,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무력하게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마는 예수님의 모습을 ‘어리석다’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마저 이기는 놀라운 사랑의 힘을 알아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부족하고 약한 인간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분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하긴 쉬워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사랑에도 증거를 요구하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상반된 모습에서 그분의 사랑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성이 드러납니다. 한 죄수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나를 구원해보라고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이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보라고 주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우리 모습입니다. 다른 죄수는 자기 잘못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합니다. 스스로 죄 많은 사람임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갈구하는 우리 모습입니다. 전자의 모습을 지양하고 후자의 모습을 지향하려면 마음속에 올바른 구원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원하는 무엇을 이루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에 증거를 요구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주님께 나를 의탁하고 그분 사랑을 온전히 누릴 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마주하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로우신 분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이 불의와 폭력이 득세하는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에서 우러난 온전한 자유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들어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