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와 김치 순두부를 버터나 치즈보다 더 좋아한 외국인 10년 넘게 쓴 안경테가 부러져도 접착제로 붙여 쓰며 검소하게 살아온 선교사 고 오기선(1907~90년) 신부를 아버지 라고 부르며 한국 순교자 현양에 헌신한 이방 사제….
1960년 6월 사제품을 받고 2개월 만에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 44년째 청주교구에서 사목해온 정안빈(미국명 Robert M. Lilly 연풍성지 주임)신부가 2월12일 오전 11시 충주 교현동성당에서 교구장 장봉훈 주교 주례로 은퇴미사를 봉헌하고 청주교구를 떠난다. 청주교구에서 활동한 마지막 메리놀외방전교회 회원이다.
축복처럼 눈발이 흩날리는 1월17일 연풍성지에서 정 신부를 만났다.
40여년간 저는 물론 메리놀회는 청주교구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청주교구는 이제 서울이나 대구대교구에 비해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교구민 여러분도 계속해서 열심한 마음을 갖길 바랍니다. 또 교황님 말씀처럼 중국이나 북녘 형제들을 위해 기도를 아끼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전 이제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떠납니다. 청주교구에서는 은퇴하지만 건강이 허락되는 한 계속 한국에 남아 사목할 생각입니다.
은발에 회색눈 올해로 세수 77세를 맞는 노 사제는 여전히 정정하고 눈가에는 열정이 흘러넘쳐 보였다.
정 신부는 한국생활 대부분을 충주 교현동본당과 수안보본당 연풍성지 등 충북 동북부권 일대에서 사목하면서 보냈다. 특히 수안보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62년 이후에는 미국 부모(야고보·헬레나씨 부부)에게서 사재를 가져다 연풍 형방건물(460평)와 성지 대지(719평)를 매입해 오늘의 연풍성지 주초를 세웠다. 성지에서 병인박해 당시 형구돌 3점을 발견한 데 이어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서 성 황석두 루가 성인 묘를 확인 82년 성지로 이장하고 성지에 대형십자가와 원죄없이 잉태되신 모후상 황석두 성인 동상 소성당과 성지회관을 세우는 등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쳤다.
또 99년부터 5년간에 걸쳐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역사(1923년~) 중 1942년부터 60년간 역사를 다룬 415쪽 분량 한국 선교(원제 Mission in the South) 를 집필 ㅡ 발간하기도 했다.
연풍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고향인 미국 메사추세츠 노스아담스가 오히려 낯설어요. 차가 없서 공소에도 걸어다녔지만 주님 공경 잘하고 인정 많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60~70년대 교우들이 무척 그립네요.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 지 40년을 훌쩍 념겼는데도 한국말이 부족해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숙명이겠지요. 영원히 한국 사람이 될 수야 없겠지만 한국사람을 너무 너무 사랑했던 미국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미국 벨몬트주 성 미카엘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덕에 80년대엔 12년간 건국대 충주캠퍼스 영어영문학과 조교수직을 겸직하며 월급으로 성당 살림을 하기도 한 정신부는 특히 수안보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함께 복자진료실을 운영하며 가난한 환자만 3만여명을 무료 진료한 것과 황석두 성인 묘지를 이장한 것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 회고했다.
정 신부는 제가 청주교구에 왔을 때 한국인 교구 사제는 단 한분도 없었지만 지금은 120명이 넘고 꽃동네와 양업고교 성지만 3곳이 생겨나는 등 얼마나 큰 발전이 이뤄졌느냐 고 반문하고 그래서 감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떠난다 고 말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루가 22 42)라는 말씀 한마디를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