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나도 삽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사랑 실천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그가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사랑의 실천을 마치 영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내가 나보다 못한 이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누가 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인가를 골라서 베풀고 싶은 만큼만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사랑해야 할 ‘이웃’을 고르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이것저것 비교하며 따지느라 사랑의 실천을 주저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올바른 마음가짐을 알려주시고자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길가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보고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더럽고 부정한 것을 본 사람처럼 길 반대쪽에 바짝 붙어 그곳을 빠져나갑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화예식을 마쳐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 상태였습니다. 굳이 피 흘린 사람과 접촉하여 부정해지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 그가 쓰러진 척 위장한 강도일 수 있고,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귀찮고 힘든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음하는 이를 돕지 못함을 미안해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그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 하는 마음으로 살다가는, 라자로를 차갑게 외면하다 영원한 고통 속에서 후회하던 ‘그 부자’처럼 되고 말 겁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무시하고 핍박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타인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니 도저히 그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것이지요. 사마리아인은 위험과 수고를 무릅쓰고 신음하는 이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해 줍니다.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돌보아 줍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수중에 있는 돈까지 다 내어주며 여관 주인에게 그를 돌봐주라고 부탁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단지 ‘현재’를 모면할 수 있도록 돕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충분히 회복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의 ‘미래’까지 돌보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를 귀찮고 힘든 ‘미래’를 계산해가며 고통을 겪는 이웃을 ‘현재’에 외면했던 앞의 두 사람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소중한 ‘데나리온’을 일면식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내어줄 수 있는지, 이웃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함께 걱정하는 깊은 배려심을 지녔는지,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그저 ‘가엾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주한 건 아닌지….
참된 사랑 실천을 위해 중요한 것은 사랑의 조건과 기준을 따지는 게 아니라, 먼저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이웃’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온 사람을 선택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주체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조건 없이 베푸는 참된 이웃이 ‘먼저’ 되어주라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선택’이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소명’이라는 하느님 중심 사고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이웃이 되어주라’는 말씀은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는걸 ‘소명’으로 알고 기꺼이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 우물쭈물, 어영부영하지 말고 민첩하게, 후회 없이 해야 ‘영원한 생명’이라는 귀한 선물을 놓치지 않습니다.
함승수(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