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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무형문화재 박재환 옹기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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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은 천한 사람들이나 한다고 손가락질 받는 직업이었어요. 하지만 박해를 피해 점촌마을에서 옹기를 빚으며 살았던 신자들의 삶은 절대로 천하지 않았습니다.”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 점촌마을에서 옹기를 배우고 옹기장이 된 박재환(요셉·90) 옹기장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다. 박 옹기장이 80년간 옹기장의 길을 걸어온 시작에는 신앙이 있었다. 그의 6대조 조부인 박예진은 박해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점촌마을에 들어와 옹기를 팔았다. 부와 명예 대신 신앙을 선택한 것이다.

“6대조 할아버님은 참판을 지낸 양반가문의 후손이었지만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벼슬에서 물러나고 집안에서도 쫓겨나게 됐습니다. 신앙을 버리면 원래의 편안한 삶을 사실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신앙을 따르기 위해 점촌마을에 들어와 옹기파는 일을 하셨죠.”

주변 미호천의 영향으로 점토가 형성됐던 점촌마을은 질 좋은 옹기용 점토를 얻기에 용이했다. 또한 천연 유약의 재료인 참나무와 소나무, 콩깍지 등을 흔하게 구할 수 있어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옹기장들이 모여들었다. 1866년경에는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유입되면서 천주교 신앙촌이 됐다.

“옹기장은 천한 취급을 받았기에 포졸들도 ‘옹기 빚는 이들은 천주교가 뭔지도 모르고 믿을 자격도 없다’며 잡으러 가지도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포졸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일이 옹기장이었기에 점촌마을에서 신자들이 공동체를 일구게 된 것이죠.”

장에서 옹기를 팔고 있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반말을 하기 일쑤였다. 갖은 멸시 속에서 점촌마을 신자들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 준 것은 신앙이었다.

“열심한 신자였던 어머니는 성교요리문답을 다 외우셨어요. 배고파 새벽에 잠에서 깬 자식들에게 교리를 알려주며 신앙을 전수해 주셨죠. 옹기를 판다고 무시하던 양반들도 어머니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하는 것을 보면 태도가 달라졌을 정도였습니다.”

11살에 시작해 80년 가까이 옹기를 빚어온 장인의 손에는 지문이 남아있지 않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옹기를 만들며 걸어온 삶. 남들만큼 공부할 수 없어 부모님을 원망한 때도 있었지만 이젠 감사한 마음이 크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이 참 현명하고 똑똑하신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게 신앙을 알려주고 신자로 만들어 놨기 때문이죠.”

항아리와 밥그릇, 기도할 물을 담는 사발그릇과 요강 등 옹기는 한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또한 고추장, 김치 등 한국인의 밥상에 빠지지 않는 발효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기에 서민의 삶을 지켜주는 도구이기도 했다. 박재환 옹기장에게 옹기와 신앙의 닮은 점을 묻자 “변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옹기 만드는 기술은 500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어요. 천주교 교리도 마찬가지죠. 전통을 지키며 이어진 기술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지킬 수 있게 해줬고, 신앙도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하며 삶의 바른 길을 알려줬죠. 그 덕분에 귀한 것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옹기와 신앙은 그렇게 닮아있습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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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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