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과 도둑’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깨어있으면서 주인에게는 문을 열어주고, 도둑은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막아내는 겁니다. 하지만 요즘 같으면 깨어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집주인이라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 것이고, 도둑이라면, 보안 시스템 설치로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단순한 파수(把守)가 아닌 것 같습니다.
1. 달리 보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
데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이곳에 남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그 반대가 되나 봅니다. 데려가는
것은 구원을 의미하고 여기 이 땅에 남는 것은 고역의 연속으로 보는 겁니다. 버려진다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내 처지에서만 보는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관점을 너의 관점으로 바꾸면 세상이 좀 평안해질 것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도 노아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고 일상 중에 그분은 들이닥칩니다. 그렇다고 노심초사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결단할
수 있겠습니다. 계절이 갈마드는 요즘입니다.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시기에
내 삶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건 지혜일 수 있겠습니다. 아주 좋은 것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겠지요.
2. 할 일을 하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충직한 종은 주인의 동선(動線)에 관심이 없습니다.
주인이 언제 오든 상관없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그 일을 그저 성실히 할 뿐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일할 시간이면 일하고, 쉴 때는 쉬고, 놀 땐 노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중요한 철학적 질문,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꼽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믿고, 희망을
품을 것인가?” 이 질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가운데 질문이라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차려 그 삶으로 나아가는 하루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3. 깨어있어야 할 이유도, 깨어있게 하시는 분도
우리 주님
문제는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 이어서 그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25) 바오로 사도는
자신 안에 있는 모순을 주님 안에만 있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과감히
증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 곧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5-23 참조) 내 안에 계시는 성령에 힘입어, 내 안에서 뭐가
들고 나는지 살필 일입니다.
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