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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 - ''깨어있음''의 참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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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주인과 도둑’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깨어있으면서 주인에게는 문을 열어주고, 도둑은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막아내는 겁니다. 하지만 요즘 같으면 깨어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집주인이라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 것이고, 도둑이라면, 보안 시스템 설치로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단순한 파수(把守)가 아닌 것 같습니다.
 

 

1. 달리 보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
 

데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이곳에 남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그 반대가 되나 봅니다. 데려가는 것은 구원을 의미하고 여기 이 땅에 남는 것은 고역의 연속으로 보는 겁니다. 버려진다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내 처지에서만 보는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관점을 너의 관점으로 바꾸면 세상이 좀 평안해질 것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도 노아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고 일상 중에 그분은 들이닥칩니다. 그렇다고 노심초사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결단할 수 있겠습니다. 계절이 갈마드는 요즘입니다.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시기에 내 삶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건 지혜일 수 있겠습니다. 아주 좋은 것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겠지요.
 

 

2. 할 일을 하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충직한 종은 주인의 동선(動線)에 관심이 없습니다. 주인이 언제 오든 상관없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그 일을 그저 성실히 할 뿐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일할 시간이면 일하고, 쉴 때는 쉬고, 놀 땐 노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중요한 철학적 질문,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꼽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믿고, 희망을 품을 것인가?” 이 질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가운데 질문이라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차려 그 삶으로 나아가는 하루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3. 깨어있어야 할 이유도, 깨어있게 하시는 분도 우리 주님
 

문제는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 이어서 그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25) 바오로 사도는 자신 안에 있는 모순을 주님 안에만 있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과감히 증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 곧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5-23 참조) 내 안에 계시는 성령에 힘입어, 내 안에서 뭐가 들고 나는지 살필 일입니다.
 

 

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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