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권력자의 호적조사령으로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전쟁이 터지고 징집이 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은 살 곳을 찾아 떠돕니다. 우크라이나, 미얀마 등이 그렇고 여기저기 폭압자의 어둡고 음습한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무기 공급이나 승전 소식이 희망이 아닙니다. 한 아기의 탄생, 그렇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희망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아기의 탄생 역시 위대하고 근본적인 희망이라는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숨통을 열고 세상에 나와 울음을 터뜨릴 모든 작은 생명에게 축복이 있길 빕니다.
1.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방법
인간이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먼저 하느님이 인간을 믿었습니다. 갓난아기가 되어 인간의 손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경천동지의 사건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목마른 신체조건을 가지고 시공간에 제약받는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겸손되이 일상을 익히시고, 세상에 나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급기야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마지막엔 빵이 되어 먹히는 존재가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발로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얼마 전, 아이에게 성탄카드를 받았습니다. 이번 성탄에 태어날 아기 예수님은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는 매년 성탄이 되면 아기 예수님이 한 명씩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년 성탄을 맞이하지만, 오늘 태어나신 그분, 정작 내 삶 속에 그분의 자리가 없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사랑의 응답이 아닐 것입니다.
2. 구유 안에 담겨있는 신비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마구간’의 가축들이 자신들의 거처를 내어 주었나 봅니다. ‘구유’ 안에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구세주 탄생을 알아보는 표시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이도 예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워 있는 아기’가 아니라 ‘눕혀있는 아기’입니다. 운신할 수 없는 아기, 벌써 두 팔 벌려 백성을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조만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아기를 중심으로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의 송아지 가족, 요셉 마리아 그리고 목동들을 상상해 봅니다. 아기는 구유(먹이통)에 눕혀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빵이 되시고 가축들의 먹이로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미일까요? 구유 안에 모든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항)
이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계십니다. 목동들이 밀고 들어간 문은 하늘의 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이의 대표이면서 인류의 대표입니다. 그들이 엎드려 경배드린 것은 가난한 이를 하늘로 들어 올린 행위였습니다. 가난의 표징으로 둘러싸인 갓난아기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지이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눕혀진 채 온몸으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혀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48항)
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