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요한 9,41)
“성당 오가는 길에 꽃 잔치가 장관이네요. 성주간과 부활이 이 시기에 있는 것이 이해됩니다. 앙상하던 가지에서 꽃이 피는 신비가 기적 같아요. 분홍 눈이 내렸어요. 머리에 손등에요. 마음도 꽃잎과 함께 봄 하늘로 오르고요.”
20대 후반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김백한 마리아 자매가 보낸 문자입니다. 지금은 칠순을 넘기셨고, 매일 성당 가는 게 유일한 낙인 분이십니다. 옛날 보았던 화려한 벚꽃을 기억했을까요? 저는 자매님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본다는 사람들은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하고 거기에만 꽃이 피어있는 줄 아는데, 마리아 자매님은 눈을 감고 우주 만물에 가득한 봄을 마음에 담고 있네요.
1.제대로 본다는 것의 의미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몸이 빛이 아니고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다”라고 하셨는데, 아마 비슷한 의미일 겁니다. 몸과 맘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몸을 바로 하고, 맘을 밝히지 않으면 본다는 것이 자칫 자신을 묶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겠습니다. 눈은 진정한 의미의 감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보면 그리될 수 있습니다. 진정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하느님은 겉모습이 아니고 속마음을 보신다고도 합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잘 본다고 말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들립니다. ‘보지 못한다고 할 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잘못을 바로잡을 여지도 생긴다. 그러나 너희는 잘 볼 뿐만 아니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구나. 따라서 너희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어설프게 본다(안다)는 것이 그만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고 말았구나.’
2.어떻게 하느님의 일로 드러낼 것인가?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3절) 시각장애인, 앞이 보이지 않는 분들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의 일이 드러날 것인가? 우리가 그분들에게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드려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일은 사회복지 차원을 넘어섭니다.
복음의 태생 소경은 거침이 없습니다. “내가 바로 그 눈먼 자다.”(9절)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36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37절)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 그의 답변은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본다는 이들은 보이는 것에 주눅 들지 모르지만, 내면이 밝은 이들은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무시하지 않지만, 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들 앞에선 하느님도 길을 비켜주실 것 같습니다.
지리산 일출을 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칠흑 같은 어둠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 여명의 순간이 한동안 지속됩니다. 드디어 손톱 끄트머리로 보이는 해가 올라옵니다. 조금씩 올라오는 순간순간 세상이 제 모습과 자기 색깔을 찾아갑니다. 제 눈이 있어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본다는 시편 말씀이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 제 마음속에 빛을 넣어주십시오.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겠습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보겠나이다.”
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